나누고 싶은 이야기

레슬리 뉴비긴(1909-1998):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선교사’ (Lesslie Newbigin(1909-1998):

ree610 2025. 1. 30. 10:16

레슬리 뉴비긴(1909-1998):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선교사’
(Lesslie Newbigin(1909-1998): 
 God's Missionary to Us)

들어가는 말

레슬리 뉴비긴은 공산주의혁명, 1,2차 세계대전, 식민주의시대의 종결과 신생국의 독립등 세계질서가 재편되며 사상과 이념이 급변하는 격동의 20세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 주신’ 위대한 선교사요 신학자(a missionary-theologian)였다. 그는 1909년에 영국 뉴캐슬의 부유한 크리스챤 사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88세로 별세할 때까지 35년간(1936-1974)간 인도 선교사로, 그 후 ‘영국에 돌아온 선교사’로 한 세기를 거의 꽉 채우는(1998년) 선교현장에서 ‘선교적인 생애’를 살았다.

  그는 1936년 남인도 힌두교 학문의 중심지인 칸치푸람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자신을 파송한 영국국교회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던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전통과 교단배경인 영국 성공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마침내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라는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는데 뉴비간은 결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였다(1946년). 뉴비긴은 그 이듬해에 CSI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회를 진정으로 경험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인도 선교현장이었다. 바울사도가 그의 서신들을 계속 선교현장에서 썼던 것같이 그도 남인도 선교현장에서 부터 <교회의 재연합(The Reunion of the Church, 1948)>와 1953년에 <교회란 무엇인가(The Household of God)>를 연이어 출판하였다. 이는 지난 2,000년 교회사에서 교회론의 본질을 선교라는 사실을 새롭게 조명한 ‘선교적 교회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그의 일생의 신념대로 선교현장에서 교회와 선교의 양대 대표기구가 하나되는 일에도 앞장섰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초창기 설립시기(1950년) 부터 선교 현장의 생생한 복음주의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직접 참여하면서 수많은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961년에 WCC와 국제선교협의회(IMC)와의 대통합을 이루어 내었다. 뉴비긴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시적이고 유기적인 연합을 추구해야한다’는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선교현장의 삶을 살았기에 이례적으로 진보와 보수 양 진영으로부터 모두 신뢰와 존경받았다. 그는 교회를 사랑하였던 목회자이며, 복음주의권의 진정한 에큐메니칼 운동자였다.
뉴비긴은 자서전에서 자신을 “다원주의자, 포용주의자, 배타주의자”등 어느 한 부류로 구분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가리켜 ‘복음주의적 포괄주의자’라 하였는데 어색하지만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뉴비긴의 삶은 전반기의 인도선교현장에서 은퇴하면서 후반기 ‘영국의 선교사’로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그는 자신이 떠나있었던 영국사회가 완전히 세속화되고 이교문화의 사회로 변화해 버린 것을 직시하며 정면으로 복음으로 대항하였다. 그는 주교의 옷을 벗어던지고 버스와 전철을 즐겨 이용하면서 버밍험의 작은 지역교회를 스스로 선택하여 목양하였다. 그는 그후 교회와 선교에 관한 수많은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연이어 출판하면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였다.

뉴비긴은 73세 때(1982년)에 그의 자서전, <아직 끝나지 않는 길(Unfinished Agenda)>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제목 그대로 그의 사역과 삶은 끝나지 않고 계속 연장되었다. 그의 주옥같은 대표 저서들은 모두 그의 ‘연장된 생애’ 기간 (1982-1992)에 출간되었다. 그 후의 그 10년을 추가하여서 1993년 (84세)에 이례적으로 자서전의 개정판을 출판하였다. 이처럼 그는 전반기 선교현장을 떠난 이후의 사역과 저서들은 통하여 20세기 후반의 세계교회와 선교학계의 선교적 교회운동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특별히 그의 자서전은 평소에 성실하게 기록한 그의 일기와 편지를 곳곳에서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요 저서들의 사상과 배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서적

<서구 기독교의 위기(The Other Side of 1984)>,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Foolishness to the Greeks), 1986>, 그리고, 지난 2,000년에 미국의 복음주의 잡지인 크리스챤니티 투데이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서적 100권으로 선정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1989>등 그의 대표하는 저서들은 오늘날 다원주의 문화의 한가운데서의 교회가 어떻게 복음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선교적으로 대처할 것인지의 탁월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20세기 후반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속문화 한가운데서 그가 그토록 살아내려고 하였던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존재이유를 밝히는 뉴비긴의 저서들은 이후의 세계교회와 선교학계에 그를 따르는 ‘복음과 우리문화 네트워크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운동’ 등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뉴비긴의 위와 같은 탁월한 선교적 업적들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그러면 우리는 뉴비긴의 이런 엄청난 영향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주목하게 된다. 일찍이 칼 바르트가 뉴비긴을 간파한 것처럼 그것은 개인의 품성에 기인한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아닌 “영적으로 단련된 복음과 교회를 향한 그의 한결같은 사랑과 신념”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글의 전개도 레슬리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는 그가 체험하였던 ‘십자가환상사건’과 복음에의 헌신, 교회와 선교, 그리고 가족사랑과 취미생활 등을 중심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출생과 성장

뉴비긴은 어린 시절을 매우 행복했던 나날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1909년 12월 8일 영국 뉴캐슬에서, 석탄운송선박회사을 운영하던  독실한 크리스챤 사업가의 아버지와 독일에서 음악을 전공한 피아니스트인 스콧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뉴비긴’이란 이름은 ‘새로운 건물’이란 뜻의 당시 흔한 이름이었다. 그는 모태신앙인으로 퀘이커계에 속한 공립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하였지만 가정에서 배웠던 기독교신앙을 학창시절이 끝날 무럽에는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고등학교시절 마지막 학기에 우연히 읽었던 두 권의 책: 마빈(F. S. Marvin)의 The Living Past와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의 The Will to Believe을 통해 기독교의신앙이 비합리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하였지만 복음에 설득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1928년 가을에 케임브리지의 퀸즈 칼리지에 입학하면서 그의 인생의 새로운 지평이 펼쳐지게 된다.

교육 배경: 케임브리지대학교 기독학생운동(SCM)

바울사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인 회심 후 곧바로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준비기간을 갖은 것처럼, 뉴비긴 또한 회심과 더불어 그의 십자가체험과 훈련의 장소는 케임브리지대학의 6년(학부와 신학대학원)과 SCM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계적인 교회인물들을 배출한 케임브리지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후에는 SCM의 간사와 회장으로 신학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었다. 트리니티 홀처럼 케임브리지의 퀸즈 칼리지는 비교적 작은 컴뮤니티인지라 입학 첫해부터 등산클럽에 가입하여 오스트리아 등 유명산을 오르기도 하였으며, 음악클럽을 만들어 학내서 연주회를 열기도 하였다. 외향적인 뉴비긴은 SCM을 만나면서 신앙을 갖게 된 1학년 말에 칼리지의 대표중의 한명이 되었다. 그는 곧 기독교신앙의 핵심인 십자가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절대 절망상태에서 선명한 십자가의 환상체험

여름학기가 끝난 후 남부 웨일즈 지방의 절망적인 삶을 살고있는 실업광부 60명과 함께한 봉사캠프에 참여한 어느 날 밤, 웨일즈인들이 술에 만취되어 서로 패싸움을 하고 있었다. 젊고 이상주의에 들떠있던 뉴비긴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한밤중에 텐트에서 홀로 절망가운데 누워있을 때  선명한 ‘십자가 환상’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하늘과 땅 사이에 공간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 걸쳐있는 십자가와 온 세계를 끌어안고 있는 팔이 보이는 희한한 환상”이었다. 그것은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인간에게 내려와서 생명과 승리를 약속하는 그 무엇으로 보였다.”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날 밤의 십자가 환상이 계기가 되어, 그는 “나는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의 자서전에 거듭 언급하였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인생의 막바지에서 그는 다시 자서전 개정판에서 그날 밤 남부 웨일즈 해변의 캠프에서의  ‘십자가’를 자신의 “인생길의 출발점이며  일생의 빛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제 (내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예전의 출발점, 곧 사우스 웨일즈에서 광부 캠프를 운영하던 어느 해변의 밤에 나에게 주어졌던 그 환상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든 인류문화사에서의 유일한 장소, 곧 죄와 용서, 속박과 자유, 갈등과 평화, 죽음과 삶 같은 궁극적인 신비들을 다루는 결정적인 장소로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십자가로부터 나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고, 그 불빛을 받아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그 날 밤의 “그 순간부터 길을 잃을 때 어떻게 내 위치를 찾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고 나의 지식이나 용기가 소진될 때에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고백하였다. 말하자면, 회심과 더불어 경험한 신비한 십자가의 환상사건은 뉴비긴의 ‘다메섹도상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뉴비긴은 대학을 졸업하는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업을 하려고 했으나  SCM에서 회심한 후 자신의 삶을 복음사역에 헌신하게 된다. 그 후 그는 간사로서 다양한 사역들을 감당하며 캠퍼스 복음화에 헌신하며 졸업 후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글라스고우대학의 전임간사로 자원하였다. 그곳에서 동료간사였던 헬렌 헨더슨을 만나 2년간 함께  교제하는 중에 헬렌의 부모가 아일랜드의 장로교의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인도의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당시의 ‘이 시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 비전을 제시하던 학생자원운동(SVM)의 세계적인 지도자였던 존 모토(John R. Mott)는 기독교 복음사역은 ‘가장 많은 열매를 맺는 사역’이라고 뉴비긴의 선교사 헌신에 깊은 확신을 심어 주었다.

케임브리지의 웨스트민스터 칼리지 신학훈련(1933-1936)

인도선교사로 출발하기 전에 신학공부를 위해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뉴비긴은 기쁨이 충만하였다. SCM 간사로서 사역 때의 직면했던 수많은 실제적인 질문들이 해결되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칼리지에서의 3년간의 신학훈련을 학문으로만 하는 것을 거절하면서 자유를 누리면서 많을 책을 읽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신학공부는 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술회하였다. 그런 과정 중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가장 완전하고 명료하게 진술한 로마서를 헬라어 원서와 그 당시의 대표적인 로마서주석 6종을 연구하며 수 개월간 씨름하였고 이를 통해서 그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중심성과 객관성이 갖는 기독교 복음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로마서공부를 끝내고 난후에 그는 “나는 자유주의자보다 복음주의자에 훨씬 더 가까웠다”고 고백하면서 로마서 공부가 자신의 신앙생활 여정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뉴비긴은 케임브리지의 SCM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과 간사로서 경험과 신학훈련을 받음으로서 갖는 특권가운데 하나는 처음부터 에큐메니컬 가족의 일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웨스트민스트 칼리지의 마지막 학년인 1934-35년에는 SCM의 회장으로서 케임브리지의 각 칼리지에 불신학생을 전도를 위한 성경공부 그룹을 활성하며 학교안팎에서 초교파적인 교단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감당하였다. 당시에 케임브리지에는 SCM과 경쟁관계에 선 복음주의 그룹인 CICCU(Cambridge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케임브리지 기독학생연맹; 현재의 IVF)가 함께 학교 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뉴비긴은 복음주의적인 확신을 가졌지만 SCM이 갖고 있는 불신대학생전도 방법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뉴비긴은 인도의 선교현장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케임브리지와 SCM을 통해서 십자가의 생생한 체험과 함께 실제적인 복음의 능력을 맛보며 전도와 양육의 실제적인 신학훈련으로 무장되었으며 에큐메니컬한 당시의 교계의 지도자들: 존 모토, 템플, 크래이머, C. F. 앤드류스, J. H. 올드햄와 같은 쟁쟁한 인사들과 교분을 쌓았던 것이다.    

남인도의 선교사역: 교회연합과 에큐메니칼 운동
  
뉴비긴은 드디어 1936년 7월에 에딘버러 장로회에서 해외 선교사로 파송되는 안수를 받고 그간 6년간 교제하던 헬렌과 결혼한 후, 그해(27세) 10월 인도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1974년 은퇴하기까지 35년간 인도에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SCM 사역경험대로 인도현장에서 복음의 씨를 뿌리면서 현장의 평신도지도자와 전임사역자를 세우고 지역교회 중심의 자립선교사역에 힘썼다. 1946년에 마침내 하나의 현지교단교회인 ‘남인도교회’를 형성하고 조직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38세(1947년)의 젊은 나이에 남인도교회의 주교로서 그 후 인도 선교현장을 떠나기까지 27년 동안 주교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3년 후(1950년)에는 WCC의 중앙의원회가 구성한 당대 세계의 최고의 학자 (칼 바르트, 에밀 부르너, 라인홀드 니버 등)들의 모임인 ‘25인 신학자 그룹’에서 의장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뉴비긴은 주교로서 또한 WCC의 지도자로서 행정적인 일에 분주한 가운데서도 현지 지도자를 양육하면서 자립교회를 세우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은 선교행정가가 아닌 ‘복음 증거자’로 부름받았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48년에 <교회의 재연합>과 연이어서 교회론에 있어서 탁월한 저서로 평가받는 <교회란 무엇인가? (The Household of God)> 출간되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의 신학공부를 할 때부터 아카데믹한 신학적 논의보다는 교회목회의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구하였고 인도의 작은 농어촌과 중소도시의 현지의 자립교회를 세우는 데에 최 우선순위를 두었다.

이같이 뉴비긴은 일평생 성경을 연구하며 선교현장에서 직면하는 난제들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말씀사역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러기에 뉴비긴의 20여권의 저술들은 매우 실제적이면서도 아울러서 창의적이며 통합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특이한 것은 뉴비간의 책들은 각주가 없다는 것이다. 한평생 그는 Ph.D 학위을 취득한 일이 없음에도 그와 그의 책을 연구하여 수많은 박사학위가 지금도 학계에서 계속 쏟아지고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과 선교

뉴비긴은 일찍부터 교회와 선교와의 심각한 이분화(dichotomy)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지리적, 점진적 선교방식은 비성경적이고 전 세계를 향해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신약성경의 선교전략임을 분명히 하였다. 교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성된 공동체이며 아울러서 파송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교회는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시는 곳이 곧 교회 (표지 sign)이며 이런 교회가 사도적인 교회라는 것이다. 사도적인 교회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도록 주어진 기간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선교에 매진하는 교회이다. 따라서 사도적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주 오해되고 있는 ‘선교와 선택교리’도  우리가 선택된 것은 개별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선택된 것이고 사도적(선교적)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뉴비긴은 선교를 위한 교회의 연합에 대해서 교회가 종말론적이고 선교적인 관점을 지닐 때에 비로소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중보기도대로 교회가 하나로 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뉴비긴이 이해하는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존재목적은  온 세상을 그리스도께 순종시키는 선교적 책임을 위해 부름받은 복음적이며 (evangelical),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협력하는 연합적이고 (ecumenical), 이를 위해 세계 모든 곳에서 교회의 재연합운동을 지치지 않고 열심히 추진해야하는 선교적(missional)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교회론과 선교관을 갖고서 뉴비긴은 1959년에 국제선교협의회 (IMC)의 총무로 선출되었고 수많은 난관들 가운데서 마침내 그는 1961년 제3차 WCC 뉴델리 총회에서 IMC와 WCC의 통합을 이루어 내었다. 여기서 뉴비긴은 그의 선교신학이 기독론 중심에서 삼위일체 중심으로 이해하였다.
이같은 교회사적인 사건의 중심에서 뉴비긴이 만났던 당대의 선교계의 인물들은 마치 우리가 선교역사책을 읽는 착각을 하게 한다; 존 모토, 스티븐 닐, 헨드릭 크레이머, 칼 바르트, 존 메케이, 비서트 후트, 맥스 웨렌, T. D. 니일즈, 한스 퀸, 마더 테레사 등의 이름들이 그들이다.

‘영국에 돌아온 선교사’(1974-1998)

35년간의 인도선교를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온(1974년) 뉴비긴은 버밍험의 선교사 양성대학인 Selly Oak Colleges에서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컬 연구’ 과정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1974-1979) 영국사회가 또 다른 선교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소위 기독교국가인 영국을 선교사적인 가슴으로 바라보며 ‘유럽재복음화’의 비전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뉴비긴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위하여 자신의 출신 교단인 장로교의 연합개혁교회(URC)의 도시 한복판의 작은 교회 목사가 되기로 선택하였고 1978-1979에는 URC의 총회장으로 섬겼다. 이 사역경험을 바탕으로 <공개된 비밀(The Open Secret, 1978)>을 출판하였다.
뉴비긴은 70세가 넘은 연로한 나이에도 교회사랑은 계속되어 버밍험 도심의 도시개발로 문닫기 직전의 20명의 교인이 남은 윈슨 그린 교회를 맡았다 (1980-1988).
이곳에서 그는 영국이 인도보다 더 열악한 이교도 사회가 된 것을 생생히 체험하였다. 이런 복음에 대한 차거운 냉대가 만연한 현실을 직면하면서 뉴비긴은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적극적인 선교적 해답을 제시하는 (앞서 소개한 그의 대표) 저서들이 연이어 출판되었다.

건강한 아침기도와 취미생활

뉴비긴은 그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들었던 성공적인 크리스챤이 되는 방법은 ‘자명종을 사라’을 기억하며 SCM의 전통대로 아침기도시간을 아내와 함께 일생동안 힘썼다.
무엇보다 치열한 선교적인 삶의 현장에서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의 동역자인 아내 헬렌과 그의 네 자녀(1남 3여)와의 행복한 가족의 사랑과 지지에 있었다. 그의 취미는 등산과 가족여행이었다. 특히 그는 기회가 주어질 때 마다 가족과 함께 유럽, 아프리카 등의 유명산을 등산하거나 새로운 여행길을 개척하기를 즐기면서 사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경험을 하곤 하였다.

나가는 말

레슬리 뉴비긴은 한마디로 위대한 선교적 삶(a state missionary life)을 온 몸으로 살았다. 20세기에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사도 바울 선교사였다.
인도선교사로서 35년, 다시 ‘영국에 돌아온 선교사’로서 25년, 그는 오로지 현장의 선교사로 60년의 믿음의 레이스를 완주하며 그의 본향으로 귀환한(88세) 였다. 지난 2,000년에 제프리 웨인라이트(Geoffery Wainwright)는 뉴비긴의 평전을 쓰면서 제목을 <레슬리 뉴비긴: ‘신학적 생애A Theological Life, 2000)’>로 붙였다.
그러나 이 제목은 일생동안 선교현장에서 살았던 뉴비긴에게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신학계에서 하나님이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불러 세우신 선교사인 바울을 ‘신학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1996년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에서 뉴비긴에 대한 특집을 내면서 그 제목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선교사(God's missionary to us)’ 한 것을 뉴비긴에 대한 가장 간명하고도 합당한 타이틀이 아닐 수 없다.

뉴비긴은 그의 생애동안 인도와 유럽에서 경험한 교차문화간의 복음에의 소통을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서구 기독교의 위기와 몰락을 일찍이 예언자적으로 예언하고 아울러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교회가 순전한 초대교회의 공동체로 회복하기위하여서는 그동안 사적인 영역에서 머물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세속 문화가 지배하는 공적 영역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교회는 그간 세계교회가 주목하던 급성장에서 주춤하더니 어느듯 2000년 들어서면서 급격한 침체와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일찍이 영국교회가 경험하였던 다문화사회와 포스트모더니즘사회의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현실적으로 벌써 다가왔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레슬리 뉴비긴을 다시 읽고 연구하여 그가 제시하는 선교적 교회론의 가르침대로 교회와 선교가 본질적으로 하나 되는 진정한 교회공동체의 회복운동이 곧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아멘!

- 선교사 배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