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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국회 탄핵 의결 전후 2번의 TV 담화를 보면서 14년 전인 2010년 3월에 <프레시안>에 실었던 칼럼이 다시 떠올랐다.

ree610 2024. 12. 19. 07:36

윤석열 국회 탄핵 의결 전후 2번의 TV 담화를 보면서 14년 전인 2010년 3월에 <프레시안>에 실었던 칼럼이 다시 떠올랐다.

-"법과 원칙"의 주창자였던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최후에서 전체주의 독재자의 말로를 본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고 나라를 발전시켰다는 차우셰스쿠의 착각

차우셰스쿠 선전에만 열중했던 루마니아 국영T.V방송과 루마니아 판 조,중,동  

농산물이 풍부했던 농업 국가였던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동안 급격한 공업화로 산업 체제를 몰고 가면서 농업기반 경제는 파탄 났다. 그러나 당시 루마니아 텔레비전 방송과 신문들은 사실들을 왜곡했고, 차우셰스쿠의 정치 경제 실정을 거꾸로 국정의 성과로 뒤집어 차우셰스쿠를 찬양하는 선전보도 일색이었다. 제 3세계 동맹전선에 앞장서겠다고 툭하면 국영항공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나다니던 차우셰스쿠는 1989년 12월 17일 루마니아 학생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중심이 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을 때도 이란을 방문 중이었다.

장로교회 목사인 퇴케시 라슬로 목사가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되찾자고 설교를 계속하자 보안군은 그를 체포했다. 이 사건은 숨죽이고 있던 루마니아인들을 격분시켰고, 차우셰스쿠에 대항해 시민들과 학생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그러자 차우셰스쿠 보안군은 발포를 가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루마니아는 국가 최대 폭력사태를 맞는다. 급히 루마니아로 귀국한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경제정책 실패로 경제가 파탄 난 현실을 자신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투철한 애국심으로 인민들을 생각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 가까이 다가 간 대통령으로, 당장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원칙을 붙잡고 걸어왔다고 말했다. 도대체 누가 시민들과 학생들을 선동하고 동원했는지, 시위의 배후를 끝까지 밝히라고 비밀경찰과 친위대와 보안군을 닦달했다. 철저한 감시체계 때문에 혁명이란 아예 불가능한데 외부 불순세력에 의해 시위가 주도되었다며 12월 21일 부쿠레슈티의 광장에서 그를 지지하는 대회를 열게 했다.

하지만 이는 차우셰스쿠의 착각이었다. 차우셰스쿠 지지 대회에 모인 군중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중앙위원회 건물 테라스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던 차우셰스쿠에게 욕설과 야유를 보내면서 군중들이 경찰 바리케이드를 넘는 모습이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광장에서는 성난 군중들이 보안군과 경찰에 대항하여 충돌하기 시작했고 차우셰스쿠 부부는 중앙위원회 건물 안으로 급히 대피했다.

루마니아 민주화 시위는 본격적으로 루마니아 전 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2월 22일 무장한 정부군이 루마니아 시민들의 민주화시위에 전격적으로 가담하면서 혁명 구국전선이 결성된다. 구국전선은 방송국과 수도 부쿠레슈티의 전 도시를 장악했고 차우셰스쿠 친위대인 보안군과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시민들과 구국전선은 차우셰스쿠 편에 선 경찰과 친위대와 보안군에 맞서서 끈덕지게 싸운다. 드디어 보안군은 시위대에 굴복하면서 중앙위원회 건물 사수를 포기하고 차우셰스쿠 내외는 건물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부쿠레슈티를 탈출하여 도망을 쳤지만, 12월 23일 지방에서 경찰에 붙잡혀 구국전선에 넘겨진다. 그들 부부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구국전선의 혁명군사법정에서 국가반역과 살인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날 오후 5시 30분 160여 발의 총탄 세례를 받는다. 이렇게 독재자 차우셰스쿠 부부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칼럼에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00322170045&Section=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