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11월 3일(창조절 10주) 주일 설교 참고:『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ree610 2024. 10. 30. 15:57

11월 3일(창조절 10주) 주일 설교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글쓴이: 조헌정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지구민주주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지구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동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한다. (반다나 시비)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룻 1:1-18; 시 146; 히 9:11-14; 막 12:28-34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룻기 1:1-18}

1 사사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한 남자가, 모압 지방으로 가서 임시로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2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태생으로서, 에브랏 가문 사람인데, 모압 지방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살았다.
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자,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다.
4 두 아들은 다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룻이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였다. 그들은 거기서 십 년쯤 살았다.
5 그러다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으니,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고, 홀로 남았다.
6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7 나오미가 살던 곳을 떠날 때에,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났다. 그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8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9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가 작별하려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니, 며느리들이 큰소리로 울면서
10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11 그러나 나오미는 말렸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12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13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14 그들은 다시 한번 큰소리로 울었다. 마침내,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
15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신학적 관점]

  룻기는 세 가지 관점에서 신학적인 의의가 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이방인 또한 유대공동체의 한 일원이 됨은 물론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부족 혹은 민족 대립을 넘어선 인류 가족공동체라는 차별 없는 열린 자세이고, 둘째는 주로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전쟁이라는 남성들의 폭력 이야기로 가득 찬 사사기와 열왕기서 사이에 베들레헴 마을에서 여성들이 주역이 된 평화와 사랑 이야기가 놓여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죽음을 넘어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는 고백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YHWH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룻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항상 적대 관계에 있는 모압 출신에 과부에 아이도 없다. 당대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 이 여인보다 더 낮은 계층의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여인은 유대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가장 낮은 계층의 여인이 가장 높은 계층의 여인으로 존중을 받는다. 꼴찌가 첫째가 되는 전복의 역사가 룻기의 주제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의 혈통으로 여겼다면 이 얘기는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를 공개한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족보 또한 이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남한 사회를 구원할 메시야를 태중에 품고 사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여인은 누구인가? 연변 출신의 중국 동포 그리고 동남아시아 이주자들이다. 결혼하는 열 쌍 중의 한 쌍은 다문화혼인(국제결혼)이다.

[주석적 관점]

베들레헴은 떡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기근이 들었다는 얘기는 역사적 반전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고, 룻의 뜻은 ‘친구’이다. 나오미는 자손도 없이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삶을 뜻하는 ‘마라’로 부를 것을 요청한다.

히브리어 단어 l’n는 능동형으로는 ‘머문다(16절)’는 뜻을 갖지만, 수동형으로 쓰이면 ‘불평하다(출 15:22)’는 뜻을 갖는다. 곧 룻은 나오미와 함께 머무는 곳이 제대로 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feasting, 247).

[설교적 관점]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 느헤미야는 유대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관점에서 이미 결혼한 이방 여인들을 내어쫓는다. 일종의 순혈주의이다. 반면 룻기는 이방 여인을 품에 안는 포용주의이다. 히틀러는 독일 게르만족의 순혈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을 포함한 장애인, 세르비아나 보스니아와 같은 여러 소수민족 사람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내몰았다.

룻기는 애초 나오미가 이주민으로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가서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맞았듯이, 룻 또한 한 명의 이주민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정착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민족 간의 경계를 넘어 온 인류가 하나의 가족임을 말해주고 있다. 8, 90년대 남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남미에 이민을 많이 갔고, 미국에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머물렀다. 북한 사람들 또한 기근이 들었을 때, 중국이나 남한으로 이주를 많이 했다. 유럽 또한 아프리카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오고 있다. 과거 식민시대에서 아프리카의 부를 빼앗은 결과이다. 미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비롯한 전쟁특수를 통해 세계 최고의 부강한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이자 전 대통령인 트럼프는 남미와 동양계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 차별 발언을 공공연히 하면서 백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있다. 자기 아버지 또한 이민자로 시작했지만, 백인우월주의와 배타주의에 빠져 있다. 여기에 남부 보수 백인 기독교인들이 합류하고 있다. 이 얼마나 비성서적이고 반기독교적인 태도인가?

{시편 146}

1 할렐루야, 내 마음 야훼를 찬양하리라.
2 한평생 야훼를 찬양하리라. 이 목숨 있는 동안 수금 타며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3 너희는 권력가들을 믿지 말아라. 사람은 너희를 구해 줄 수 없으니
4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때에는 모든 계획 사라진다.
5 복되어라, 야곱의 하느님께 도움받는 사람! 자기 하느님 야훼께 희망을 거는 사람!
6 하느님은 하늘과 땅, 바다와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언제나 신의를 지키시고
7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야훼는, 묶인 자들을 풀어 주신다.
8 야훼,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야훼, 거꾸러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며 야훼, 의인을 사랑하신다.
9 야훼,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시나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10 야훼, 영원히 다스리시니 시온아, 네 하느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히브리서 9:11-14}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거쳐서,
12 오직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룩하여 주셨습니다.
13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해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14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신학적 관점]

고대 종교에서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동물의 희생 번제는 매우 타산적이고 이성적인 행위였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법칙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천 년 전 갈릴리 예수로부터 시작한 믿음은 ‘신의 사랑’을 전제로 이러한 반복적인 동물희생 제의를 무의미한 종교 행위로 만들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학적인 도약인가! 이는 반폭력으로서의 인류 평화 사상 발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목회적 관점]

고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우주의 중심(배꼽)으로 보았다. 모든 종교에는 성소가 있다. 이는 신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이다. 교회의 설교단(제단)을 이러한 거룩한 장소로 여겨 단상을 올라갈 때에 신발을 벗는다. 일부 보수 교단에서는 여성 신도들을 차별하여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거룩은 장소가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셨다. 혹 교회 제단을 너무 신성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석적 관점]

영원한 ‘구원’(12절)으로 번역된 희랍어 lutrosis는 ‘속량(贖良, redemption)’을 뜻하며, 히브리서에서는 유일하다. 속량의 의미는 돈으로 산 노예를 자유민(良人)이 되게 한다는 의미이다.

[설교적 관점]

욤 키푸르(Yom Kippur)라고 불리는 대속죄일(大贖罪日)로서 유대인들의 명절 중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절기이다. 참조. 레위기 16장과 23장. 이날 뽑힌 대제사장은 홀로 지성소에 들어가 동물의 피를 뿌림으로 백성들의 죄의 용서를 빈다.

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은 『소년은 온다』에서 광주 518의 희생자들의 최후 저항의 장소인 광주도청과 희생자들의 관이 놓여있던 상무관을 거룩한 장소로 승화시켰다. 곧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광주 민중들의 희생의 피를 통해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고 보듬었다.
14절의 말씀을 한마디로 줄이면 ‘행동하는 양심’이다.

{마가복음 12:28-34}

28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34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신학적 관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일치가 모세 율법(토라)의 근본임을 밝힘으로 동물 희생 제의(祭儀)를 중시하는 예루살렘 성전 체제(體制)를 비판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하느님 사랑의 크기를 비교하고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오직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크기로만 측정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을 향한 주일 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한 주간의 우리의 예배가 시작한다.

[주석적 관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쓰인 희랍어는 아가페(agape)이다. 이는 신적인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모순이지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더 큰 모순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서 반사하는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10:25-37)은 마가복음 본문에 이어 율법학자는 그렇다면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 이야기를 통해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역으로 던진다. 곧 아가페의 사랑은 인간의 판단과 차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당시 율법학자들 사이에는 ‘나의 이웃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질문을 놓고 논쟁이 심했다.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원수가 곧 사랑의 대상인 이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고대 시대에 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친족이었다. 곧 지리적인 이웃들이다. 그러나 ‘이웃’ 동네 곧 다른 씨족이나 부족은 경쟁의 대상이었고 다툼과 전쟁이 있었다. 곧 원수가 나의 이웃이 된다.

[설교적 관점]

예수를 따르는 일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고 이는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웃 사랑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사랑을 전제하고 있어 논리상 모순이 된다. 그러나 자기 부정은 이기적 욕망을 뜻하는 말이지, 자아로서의 사람됨을 부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는 일은 자아 주체성의 확립을 뜻한다.

하느님 사랑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자 답이고, 이웃 사랑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실천에 대한 물음이자 답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의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우리 사랑의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곧 하느님의 나라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율법이 규정하는 죄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겼다. 곧 사랑하는 일은 기존체제와의 다툼이자 저항이 된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