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눈물 💦
몽골의 고비사막에 대한 다큐를 보았다.
낙타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바람 부는 잿빛 사막의 모래 위에서
어미는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새끼를 낳고 있었다.
막 땅에 떨어진 새끼는 꿈틀거리다가
비척비척 일어서더니 가까스로 걷게 되자
바로 어미의 젖부터 찾았다.
그런데 어미는 새끼가 젖을 물려고 하자
한사코 새끼를 떠밀며 젖을 주지 않았다.
낙타 주인이 보다 못해 억지로 어미를 붙들고 새끼에게 젖을 물리려 하자 어미는 어린 갓 태어난 새끼를 발로 툭 차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3일 동안 새끼는 어미로부터 거부당하고 젖을 먹을 수 없자 주인은 인근의 샤먼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새끼에게 젖을 물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늙은 샤먼은 자신의 젊은 아들에게 마두금을 연주하게 하고, 자신은 어미 낙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한참 정성을 들이니 얼마 후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어미 낙타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새끼에게 젖을 내주는 것이었다.
잃었던 모성애를 되찾은 것이다.
물론 모든 낙타가 그러는 것은 아니며
이런 경우는 가끔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 샤먼은 말한다. “어미 낙타가 새끼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미움 때문이었다고.
출산을 통해 어미가 겪은 엄청난 고통과 죽음과도 같은 두려움 때문에 생긴 새끼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다고.”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모성의 본능조차 잊을 정도로 자식이 미웠을까. 그럴 수도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며 내 안의 미움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그 의문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었다.
내 안에는 너무 많은 미움들이 있었다.
이웃들에 대한 미움, 직장 상사에 대한 미움,
자신에 대한 미움, 생활 속의 시시콜콜한 미움과
세상에 대한 막연한 미움까지
내 안에는 오래된 미움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 미움들을 정면으로 거부할 용기도,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도 없었기에 그 미움에 대해 반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낙타가 제 새끼를 거부한 것은 솔직한 자기감정의 표현이요, 스스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낸 어쩌면 진솔한 삶의 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낙타의 눈물>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스스로의 미움을 스스로 거둘 수 있는 솔직하고 순수한 감정, 그리고 그 용기 있는 삶의 태도는 내게 주는 각성이었다.
진정한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대상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깨끗이 지우고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나는 미움의 감정을 말끔하게 지우지 못하고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어설픈 인간관계 때문에
입으로만 용서하고 사랑한다며 살지는 않을까.
위선적인 사랑에 스스로 도취되어 진정한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그 샤먼의 말을 빌리면
낙타는 원래 마음이 여린 동물이어서 상처를 쉽게 받기도 하지만 쉽게 회복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낙타의 아름답고 순결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안한 영혼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마두금 연주와
샤먼의 온화한 손길이 자신의 마음에 이르는 순간,
그 모든 우주의 사랑을 그대로 온몸으로 받아 누릴 줄 아는 착한심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런데 나는 그런 순수한 믿음이 없다.
감정마저도 잘 포장하며 사는 시대를 살아온 나는
이 ‘낙타의 눈물’을 담은 눈물샘이
아마 다 마르지나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
어미 연어는 알을 낳은 후 한 쪽을 지키고 앉아 있게 되는데,이는 갓 부화되어 나온 새끼들이 아직 먹이를 찾을 줄 몰라어미의 살코기에 의존해 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미 연어는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며
새끼들이 맘껏 자신의 살을 뜯어먹게 내버려 둡니다.
새끼들은그렇게 성장하고,
어미는 결국 뼈만 남게 되어가며,
소리없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모성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어를 <모성애의 물고기>라고 합니다.
가물치는 알을 낳은 후
바로 실명하여 먹이를 찾을 수 없어
그저 배고픔을 참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부화되어 나온 수천마리의 새끼들이
천부적으로 이를 깨닫고는
어미가 굶어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한 마리씩 자진하여 어미 입으로 들어가
어미의 굶주린 배를 채워 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새끼들의 희생에 의존하다
시간이 지나, 어미가 눈을 뜰 때쯤이면
남은 새끼의 양은 십분의 일 조차도
안된다고 하며, 대부분은 자신의 생명을
어미를 위해 희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물치를<효자 물고기>라고 합니다.
두 물고기들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살아가면서
우린 모두 이 두가지 역할을 하게 되지요.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하찮은 이 물고기들보다 더 잘 하고 있는지...,
연어 같은 모성애는 있으면서,
가물치 같은 효심은 가지고 있지 못한 자식은 아닌지...,
자신을 답답한 마음으로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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