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다

ree610 2024. 2. 14. 07:12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다]

- 이정하 -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비에 젖을수록 오히려 생기가 넘치는 은사시나무,
그 은사시나무의 푸르름으로 그대의 가슴에
한 점 나뭇잎으로 찍혀있고 싶었습니다.

어서오세요, 그대,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오실 땐
햇볕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요.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 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려
저 창너머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는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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