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사색 1
- 시편의 150계단, 그 첫 번째 발을 내딛으며
1. 나에게 불편한 시편!
1991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나는 독일 TV를 통해 접했다. 그때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만났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핵심 세력이던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정교회가 민족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반면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로마-가톨릭교회가 그런 위치에 있었다. 같은 날, 같은 뉴스에서 두 진영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이 각각 참석한 미사가 방영되었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세르비아가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군인들을 축성하였다. 크로아티아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적 세르비아를 무찌르고 독립을 온전히 쟁취하기를 기도하며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 두 장면은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나를 오랫동안 사로잡으며 신학적 성찰로 이끌어 갔다.
신들이 싸우는 전쟁 이야기를 우리는 신화적인 옛 이야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상은 신들의 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 놀랍게도 이 전쟁은 같은 신을 믿고 있는 민족들 사이에서도 빈번히 일어났다. 서구에서 일어난 중세의 백년전쟁, 17세기의 30년 전쟁, 세계 제1,2차 대전 등이 보여주듯이. 각 나라의 교회는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을 민족 신으로 끌어내리며 신들의 전쟁에 불을 붙였다. 20세기 말의 세르비아 정교회와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 로마-가톨릭교회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21세기엔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게 만드는 미사나 예배, 이것은 자기중심적 신앙이 낳은 기형적 종양의 온실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나의 반대편에 있는 ‘너’를 적으로 간주하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신앙적으로 세례를 받고 공식적인 민족 종교의 주춧돌이 될 때가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기형적인 것이 본류 자리를 꿰찬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수가 되는 모든 ‘나의 너’를 무너뜨리는 나만을 위한 승리의 신으로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욕심의 산물이다. 하나님을 세상의 주로 보지 않고 나와 내 나라만을 보호하는 요새와 방패와 산성으로 제한시키는 어리석음의 종국이다. 자기중심적 신앙이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 ‘그리스도인-교’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적인 배타성을 낳고 길렀다. ‘나’와 ‘우리’를 신의 도움을 받는 복 있는 자의 반열에 올리고, ‘너’와 ‘너희’를 신의 저주를 받는 ‘그것’으로 전락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고를 형성하는데 성경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성경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교회의 책이 되었기에 ‘만군의 하나님’, 곧 ‘군대의 하나님’은 유대교를 넘어 기독교 세계에서도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이와 함께 신들의 우주 전쟁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부족과 부족,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거침없이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강대국 사이에 끼어 늘 힘든 길을 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군대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과 같이 격변의 시기를 거치던 예언서들에 ‘군대의 하나님’이란 호칭이 많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대변한다. 그런데 시편에 그러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편은 개인적인 기도서로 영적 생활의 중심 텍스트로 자리매김하였다. 나아가 시편송 및 교독문으로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도 가장 빈번히 사용되었다. 수도원의 하루는 시편으로 시작하여 시편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시편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시편 사랑은 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크고 깊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널리 애용되는 기도 및 예배서에 하나님을 ‘군대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구절이 꽤 나온다는 것은 ‘시편-人’들의 무의식에 이런 하나님 상을 스며들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편에는 나의 관점에서 ‘나의 너’가 되는 이들을 적, 원수, 악인, 어리석은 자 등으로 낙인을 찍고 이들의 멸망과 죽음을 바라는 저주의 기도 또한 적지 않다. 그들을 산산이 부수어서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 보내고, 진흙처럼 짓이겨 버렸다는 것이 감사 기도의 내용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의 기도를 넘어 집단적인 기도의 내용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예배에서 예배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무의식에 하나님은 ‘나’와 ‘우리’ 편이고, 원수인 ‘너’와 ‘너희’는 하나님의 징벌 대상이 된다는 도식이 형성될 수 있다.
나는 이런 기형적인 종교적 무의식이 형성되는데 시편이 모세 오경 못지않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991년 이후의 시편 읽기는 그 이전의 시편읽기에 비해 불편하였다. 산상수훈과는 결이 너무도 다르게 느껴지는 배타적인 하나님, 나는 이런 하나님 상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의 기도와 찬양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었다. 그런 문자가 성찰적 여과 없이 개인의 입과 교회의 예배를 통해 신자들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만 제한하는 배타적 종교 유전자가 형성되는 것에 마음이 아플 때도 있었다.
ㅡ 강치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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