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정 예배

12월 25일 ~ 30일 가정 예배

ree610 2023. 12. 24. 17:22

서로 다른 생각의 위험
본문: 삼상 27:1~12
찬송가: 435장

성경에는 암흑시대로 불리는 때가 있다. 말라기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신구약의 중간기도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암흑기는 사사기로 볼 수 있다. 사사기를 대표하는 말은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소견, 생각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이 큰 잘못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보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지, 또한 나만을 위한 생각을 옳은 생각으로 포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 오늘 읽은 말씀이다.
어쩌면 사사기보다 더 암흑의 시기가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했던 시기일 것이다.
 
1절을 통해서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로 시작한 27장은 12절에 아기스가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로 끝을 맺는다. 다윗의 생각과 아기스의 생각이 지배하는 이 짧은 27장에 어디에도 하나님께 묻는 장면이 없었다. 다윗이 광야에서 그토록 훈련받았던 하나님을 찾는 방법과 은혜를 여기서는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듣고, 읽고, 보고 새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 영혼의 중심에 새겨지고 체질화되어야 한다. 다윗은 블레셋이 자기의 안전을 보장할 줄 생각했다. 가드왕 아기스는 다윗을 자기 편으로 만들 줄로 생각했다. 꼭 세상의 생리와 같다. 이해는 된다. 다윗은 너무나 지쳤던 것이다. 그래서 적국인 블레셋으로 간다. 그 블레셋이 자기를 보호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 블레셋에서 다윗을 보호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생각을 잘 정리해야 한다. 생각한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주님께 묻는 것이다. 다윗의 전성기를 보면 늘 주님께 묻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할수록 더 물어야 한다. 사소한 것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훈련을 할 때, 말씀에 의지하는 훈련을 할 때 암흑의 시대에서 벗어난 밝은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새해에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나의 주, 나의 왕으로 고백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나의 왕 되신 주님의 뜻만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전도 지향적 생활을 하자
본문: 골 4:2~6
찬송가: 498장

반 복음적인 사회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당부한 전도지향적인 생활을 배워 실천해야 한다.
 
첫째, 전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한다(골4:3). 그는 전도하기 전에 기도가 필요함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그의 입을 열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간구하길 바랐다. 바울에게 전도는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전도의 현장에 나가기 전에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도가 없는 전도는 힘을 잃는다. 능력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자를 위해 중보 할 때 하나님께선 그분의 손으로 친히 영혼을 구원하실 것이다.
 
둘째, 외인에게 지혜로 행해야 한다. 바울은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한다(골4:5). 전도에 방해가 되는 지혜롭지 못한 생활 태도를 버리고 지혜롭게 대하는 생활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말로 전도하는 것보다 지혜로운 생활로 전도해야 한다.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알지 못하는 말세에 처해 있음에도 주님의 지상명령인 전도에는 너무나도 소홀하다. 전도 현장에 나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전도를 위해 입 한 번 열지 않는다. 바울은 그러한 태도에 대해 경책한다. 외인을 지혜롭게 대하되 세월을 아끼라고 한다. 전도를 가로막는 생활을 하지 말고, 지혜로운 인간관계와 함께 세월을 아껴서 전도의 도구로서의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한다.
 
셋째, 소금으로 맛을 내듯 생활해야 한다.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한다(골4:6). 외인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전도자는 생활, 관계, 언어에서 소금이 맛을 내듯이 호감이 가는 태도로 생활해야 한다. 맛을 잃은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전도해도 전도의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 오히려 전도의 길을 가로막는 자리에 서게 되고, 자신이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이 된다. 인간관계나 대화가 무미건조하고 무뚝뚝한 그리스도인은 전도의 장애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직장에서나 사회생활 속에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칭송받고 신뢰를 받는 생활이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내는 전도지향적인 생활이다.
 
전도는 지상 명령이다. 감옥에서조차 전도를 위해 고민한 바울과 같이, 전도지향적인 생활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저희에게 구령의 열정을 허락하소서. 전도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지혜로 세월을 아끼게 하시며, 소금으로 맛을 내듯 생활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겸손한 자가 되자
본문: 시 2:4, 14:1
찬송가: 425장

1941년 2월 독일의 히틀러는 육군대장 롬멜 장군을 급히 불렀다. 1차 대전 때부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롬멜 장군에게 히틀러는 영국군을 리비아에서 몰아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롬멜은 3월에 공격을 개시하여 단숨에 동쪽 방향으로 650킬로미터를 진격해서 영국군 2개 기갑여단을 포위하였고, 적군의 장군 한 명을 생포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영국의 마지막 요새만을 남기고 영국군을 모두 이집트로 몰아냈다. 당시 처칠은 이 전투를 가리켜 '1급 재앙'이라 불렀고, 이때 영국 언론들은 롬멜 장군에게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항상 앞에서 지휘하는 롬멜 장군은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가는 곳마다 승리하여 독일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하였고 1944년 7월 17일 롬멜의 차량이 미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전복되었고 롬멜은 중상을 입은 채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어야 했다. 그로부터 3일 뒤 독일군 지휘본부에는 히틀러의 목숨을 노린 폭탄이 터졌다. 범인 가운데 하나가 고문을 받다가 배후에 롬멜이 있다고 말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된다. 그로부터 3개월 후 10월 14일 두 명의 장군이 롬멜 장군의 집을 찾았다. 그들은 부상 중인 롬멜에게 양자택일을 종용했다. 군사 재판을 택하게 되면 가족도 재산도 몰수당한 채 평생을 수치스럽게 살아야 하지만, 독약을 택하게 되면 가족에게는 명예와 영화가 보장될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졌다. 롬멜 장군은 독약을 선택했다. 히틀러는 국민들에게 7월 17일 적의 공습으로 롬멜이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을 창조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어떠실까? 불순종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을 우상숭배와 같이 싫어하신다. 인간의 가장 악한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했다. 이런 말을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겸손이다. 진정한 축복은 지금 내가 주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재이다. 지혜롭고 겸손한 믿음의 길을 걷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서로 사랑하며 겸손히 섬김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그로 쉬지 못하게 하라
본문: 사 62:6~12
찬송가: 312장

새로운 한해는 어떻게 하면 계획하고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이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으며, 목표를 어떤 방법으로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동분서주 하면서 뛰어다니고 많은 것을 희생하여 성취했다고 한들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하지 못했다면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다.
 
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런데 우리는 내 생각으로 계획하고 목표를 세운다. 내 방법으로 성취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니 힘은 힘대로 들고 계획은 엉망이 되고, 열심히 일했음에도 손에 쥐는 것이 없다. 심지어는 마지막 날 '불법을 행한 자'라는 책망을 듣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이 법, 즉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불법이다. 그 성취가 아무리 높고 위대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사야 62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전제로 기록된 말씀이다. 그들은 한때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열망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바벨론 포로기에 모두들 포로로 잡혀가고 유다 백성들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예루살렘에는 이방민족들이 들어와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계획한 대로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때 이사야는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그'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부터 일하시는 하나님이셨다. 해와 달과 별들과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 손으로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분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만물과 사람은 보시기에 좋았다. 완벽했다. 우리의 최선은 그분이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언제나 선하다. 아름답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시도록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경청'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분의 뜻을 경청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순종'하는 기도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 인생을 맡기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주님처럼 울어 주자
본문: 요 11:33~35
찬송가: 135장

성경에는 주님이 우셨다(Dominus Flevit)는 말씀이 세 번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을 내다보시고 우신 애국적인 눈물(눅 19:41~43),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신 사명의 눈물(히 5:7), 그리고 본문이다. 이것은 주님이 평생 세 번만 우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울보'였다는 뜻이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주님의 눈물이 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문학에서 3은 그냥 숫자 3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상징적인 수를 통하여 주님께서 눈물의 사람이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아끼신 사람들의 오빠이자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우셨다. 이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눈물은 우는 사람과 함께 우신 공감의 눈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우신 동정의 눈물,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우신 슬픔의 눈물이다. 여기에 학자들은 한 가지를 덧붙여 인간의 한계를 비통하게 여기신 비탄의 눈물이라고 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에게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는데, 그는 이런 상황을 '한계상황'이라 했다. 한계상황의 대표적인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죄를 범한 인간의 숙명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벽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한계상황 외에도 어떤 사람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 탈출구가 없는 절박한 삶의 형편이 한계상황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런 우리의 한계상황을 잘 아신다는 것이다. 그 한계상황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보시고 비통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신다. 본문이 이런 주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현실을 비통해 하시며 비탄의 눈물만 흘리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한계상황에서 건져주셨다. 결국 주님의 눈물은 나사로를 회복시키는 출발점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무엇'을 위해서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주님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말라버렸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 주변의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바닥까지 추락한 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 우리의 가정과 자녀를 위해서 우리의 눈물이 필요한 때이다. 특히 이 엄동설한에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뜨거운 눈물이 필요한 때이다. 눈물은 회복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영혼을 기르는 양수(羊水)와 같다. 생명의 복음은 우리의 눈물을 통해 역사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울보처럼 한 없이 울어주신 주님, 우리 또한 주님처럼 눈물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토-시므온의 신앙
본문: 눅 2:25~33
찬송가: 423장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을 정도로 성령님으로 충만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더군다나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까지 누렸다. 시므온이 가졌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재림 예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은혜를 입어야 하겠다.
 
첫째, 시므온은 경건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라고 말씀한다. 매일 경건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경건하여'(율라베스)라는 말은 '주의 깊은, 신중한, 경외하는'이라는 뜻이다. 시므온은 시대적인 상황을 초월하여 주의 깊고, 신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났던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약자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둘째, 시므온은 성전에 들어갔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시므온이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어디를 중심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의 삶과 신앙이 결정된다. 시므온은 경건한 삶을 살면서 늘 성전을 가까이 했다. '들어가매'(엘코마이)라는 말은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인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기도 한다. 시므온은 메시아를 사모하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며 성전 중심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성전에서 메시아를 만났던 것이다. 죄 많은 이 세상이지만 여전히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요, 구원의 방주다. 교회 중심의 삶을 살자. 반드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셋째, 시므온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의미한다. 시므온은 경건한 삶과 교회 중심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감격하여 신실하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과 기대와 소망은 결국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29절부터 32절까지 이어지는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실 위대한 비전이요, 모든 민족과 열방이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 받게 된다는 소망이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때,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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