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정 예배

7월 29일 ~ 8월 3일 가정 예배

ree610 2024. 7. 28. 15:47

하나님을 아는 지식
본문: 벧후 3:18
찬송가: 453장

베드로 사도는 편지의 결론을 이렇게 맺는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은혜'는 주님의 돌보심이다. '지식'의 역할은 무엇인가?
 
첫째, 지식은 은혜와 평강을 넘치게 하는 파이프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은혜와 평강도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야 풍성해진다. 필자의 부친은 목수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톱과 망치가 연장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탁월한 기술자였던지라 그것만으로도 훌륭히 집을 지으셨다. 아버지에 비하면 필자는 기술도 부족하고, 본업도 목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보다 더 빠르고 깔끔하게 일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오늘날의 수많은 전동공구들은 적재적소에 속도와 정밀도를 자랑하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얻게되는 신앙의 연장들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얼마나 더 넘치게 하겠는가? 성경말씀을 더 간절히 사모하고 배우라. 갖가지 연장을 갖추고 있어도 사용해본 적이 없다면 아무래도 어설프기 마련이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여기까지를 포함한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집이 완성된다. 그러나 말씀을 사용해봐야 반석 위에 지을 수 있다. 지식의 말씀을 내 삶에 적극적으로 적용해보라. 지식이 파이프가 커져서 은혜와 평강이 흘러넘치게 하라.
 
둘째, 지식은 기도의 파이프가 막히지 않게 한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흘러가야 할 것이 막히면 대단한 불편과 고통이 따른다. 지난 겨울 우리는 기상이변이라 부를 만큼의 혹한을 지나왔다. 그때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아 고생한 집들이 많았다. 콘덴싱 보일러의 배수관이 얼어서 발생한 일이었다. 막힌 배관에서 얼음을 빼내고 보온재를 감쌌다. 겨우내 아무 고장 없이 그 따뜻함을 누릴 수 있었다. 지식 없는 사람은 그 따스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왜 중단되는지 알지 못한다. 베드로 사도가 예로 든 '아내를 귀히 여기지 못하는 것'도 기도가 막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유들로 기도의 파이프가 막힐 수 있다. 은혜와 평강이 중단될 수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붙들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오늘의 기도
언제나 하나님 은혜와 평강에 머물 줄 아는 지식을 사모하게 하소서. 그 지식 안에 자라도록 은혜와 평강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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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믿음과 착한 양심을 갖자
본문: 딤전 1:19, 딤후 2:20~21
찬송가: 545장

무더운 여름에 냉수를 마시러 부엌에 들어갔다. 그 곳에 금그릇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도 있는데 모두 흙이나 음식물이 묻어 있다고 하면 누구도 그 그릇으로 냉수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질그릇이나 바가지라도 깨끗한 그릇을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깨끗한 사람, 진실한 사람, 의로운 사람을 찾고 계신다.
 
어떤 사람이라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이면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바울이 디모데를 친아들과 같이 생각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를 생각하며 눈물이 나도록 보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디모데가 청결한 양심의 소유자이며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깨끗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일인지 모른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간절히 부탁하기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말했다. 양심을 버리면 믿음도 배가 파선하듯이 깨져버린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믿음을 가지라"고 하지 않고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다. 착한 양심을 잃어버리면 믿음도 거짓 믿음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성령 충만하고 은사와 능력을 받은 사람은 양심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줄 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고백한다. 또한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사람이 많아질 때 그 나라와 교회는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 1787년 10월 28일, 27세의 젊은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 당시 상류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품위를 위한 교양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그 날 이후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을 모두 떨쳐버렸다. 그는 암살 위협, 중상모략,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노예무역 폐지에 매진했다. 결국 의회에서 싸워온 지 50여년 만에 영국의 노예무역이 폐지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
 
오늘의 기도
저희의 양심이 깨끗하여 주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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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리도 하늘을 날 수 있다
본문: 사 40:27~31
찬송가: 354장

비행기를 처음 만든 사람은 라이트 형제이다. 그들은 새를 보고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어서 비행체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도 라이트형제처럼 하늘을 날고 싶을 때가 있다. 바쁜데 길이 막혀서 답답할 때는 차에다 날개를 달아서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여러 가지 경제 여건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취업문제로 답답해하고 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기에 모두가 갈등을 가지고 있다. 이럴 때 술이라도 먹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그래도 믿음이 있다고 그러지도 못하고 무기력증에 빠져서 탄식하다가 영적인 위기를 만나는 사람들을 본다.
 
본문은 영적인 위기에 빠져 탄식하고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 세상을 만드신 분, 피곤하지 않으신 분, 지혜와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시다. 너는 듣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이시다. 너는 홍해를 가르고 출애굽 시킨 기사를 읽지 못했냐? 너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인 땅을 주셨다는 것을 듣지 못했냐? 너는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한 분이 하나님임을 알지 못하느냐? 이제 알았으면 하나님을 앙망하라! 하나님을 앙망해야 새 힘을 얻는다. 이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다. 앙망은 소망으로 삼고 바라본다는 뜻이다. 멀리서서가 아니라 가까이서, 대충이 아니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눈을 들어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변을 맴돌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서 외쳐야 한다. 이것이 앙망이다. 그러면 새 힘을 얻게 될 것이고, 오늘의 어려움이 독수리처럼 세상을 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날치가 어떤 물고기인가? 날치는 수면위로 뛰어 올라 날기도 하는 물고기다. 날치가 어떤 모습으로 물위를 나는가? 날치는 가슴과 배의 지느러미를 펴서 공중을 나른다. 날치는 단숨에 4킬로미터를 날기도 한다. 날치가 어떤 때에 공중을 나는가? 큰 고기에게 쫓기다가 위급한 순간 머리를 하늘로 향하면 힘차게 비상하게 된다.
 
우리는 날치에게서 무엇을 배울까? 위급할 때 머리를 하늘로 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앙망이다. 진화론자들이 뭐라고 해도 날치는 새가 아니다. 그리고 날개도 없다. 그러나 위급할 때 하늘을 난다. 우리도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늘을 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의 어려움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실의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오늘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앙망함으로 날치처럼 날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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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찼더라
본문: 요 6:5~13
찬송가: 183장

새벽기도 후 교회 마당에 이슬비가 살포시 내려있었다. 정원의 소나무사이로 하얗게 피어난 백합이 마냥 사랑스럽기만하다. 온 대지가 깨끗해져 내 마음도 유쾌해지며 눈을 들어 여름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주님이 하늘보좌에서 온 세상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보고 계심이 느껴졌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다. 병든 자, 목마른 자, 길을 잃고 헤메는 자, 목자없는 양 같이 유리하는 이들을 친히 다 보고 계셨다. 해가 기울어지고 빈들에서 제자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주님은 이들의 마음을 이미 아시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빌립이 어찌할지 아시고 시험하고자 하심이었다. 계산에 빠른 빌립은 "200데나리온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섬세한 안드레는 한 아이의 도시락이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고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앉아 있는 자들에게 원대로 나누어주신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주의 기적을 맛보며 '찼더라의 은혜'를 맛볼 수 있을까? 첫째로, 말씀을 사모하여 주님 발치에 앉아있는 자들이다. 배가 고파도 돌아가지 않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
 
둘째로,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자들이다. 허허벌판 빈들이라도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믿음이다.마태복음 14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앞에 헤롯왕궁의 화려한이야기가 등장한다. 음악이 있고, 흥겨운 춤이 있고, 먹을 게 풍족한 잔치에 세례요한의 목이 잘려 머리가 소반에 담기는 죽음과 공포의 현장이다. 반면에 주님이 계시는 곳은 빈들이요, 저물었는데도 연약한 자들의 따름인데도 생명의 역사, 기적의 역사,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는 정 반대의 상황이다.
 
셋째로,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 "악인의 궁정에서 천날보다 내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것이 좋사오니"리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의 가난한 심령에 오늘도 주님은 하늘의 복으로 가득하게 채워주신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원대로 주시니라, 열두바구니에 찼더라 등 비움 뒤에 충만히 채워지는 역사를 체험한다.
 
마지막으로,말씀 앞에 순종하는자들이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것이 없게 하라"는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그 남은 부스러기 조각이 또 12바구니에 가득 찼다. 그 남은 조각으로 또 다른 생명을 살리려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제 주님을 통하여 '찼더라'의 역사를 체험한 우리는 남은 부스러기의 은혜를 가벼이 흘려보내지 말고 또 다른 빈들의 기적을 그늘진 곳에 흘려 보내야겠다.
 
오늘의 기도
놀라운 주님! '찼더라'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제 또 다른 사람을 살릴수 있도록 은총내려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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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본문: 겔 11:19~21
찬송가: 427장

 본문은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 백성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서 우상 숭배를 하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예언자들이 외쳤지만 전혀 듣지 않는다. 오히려 안전하다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만 믿다가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 에스겔 선지자는 사로 잡혀간 유대 백성들에게 그발 강가에서 통곡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실 것이며 앞으로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포한다. 사로 잡혀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유대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희망의 메시지였다. 이 시대에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째, 일치하는 마음이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일치한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이다. 하나로 뭉쳐진 마음이다. 일치하는 마음이 되려면 다른 이에게 맞추는 희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치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둘째, 부드러운 마음이다.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여기의 '굳은 마음'의 원어는 '렙 하에벤'이다. '하에벤' 은 '돌'이란 뜻이다. 즉 굳은 마음이란 돌 같이 굳어버린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은 '렙 바살'이다. '바살' 은 '피부와 살'을 의미한다. 성령은 돌같이 굳어버린 마음을 제해버리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감싸준다. 부드러운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는 상대방을 찌르는 가시가 없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따뜻한 용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이해하고 수용하려 한다. 강압적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가르치고 인도한다.
 셋째, 순종하는 마음이다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여기의 '좇으며' 와 '행하리니'는 순종하는 마음의 행위를 의미한다. 유대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까닭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 다시 자유를 허락하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란다. 성령 안에서 일치하는 마음을 가지자.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자. 아무리 어려워도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소유하자. 그래서 세월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받아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분열과 갈등과 분노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그리스도로 하나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주셔서 이 땅이 하나되고 평화롭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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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섬기며 사는 가정
본문: 창 39:1~6
찬송가: 320장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은 섬김의 삶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겨주셨듯, 섬김을 배운 제자들이 성도들을 섬겨주었듯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섬겨야 할까?
 
보디발은 요셉을 돈으로 샀다. 시간이 지나자 특별해지기 시작했는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이 보였고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도 보았다. 보디발은 그에게 일을 맡겼더니 잘 감당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났다. 그래서 집안일을 하나씩 맡기다가 결국 가정총무로 세워 모든 것을 주관하도록 했다.
 
이렇게 요셉이 노예에서 가정 총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복을 주셨고 형통하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보디발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섬기며'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 섬김은 예배하다 봉사하다는 뜻인데 요셉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나님께 예배하듯이 마음과 뜻과 정을 다했으며 주변 동료들을 대할 때도 주께 하듯 하며 하나님 대하듯이 존중했다. 그랬더니 노예에서 가정 총무로, 감옥의 귀빈 접대 담당으로, 애굽 총리로 세워졌고 왕의 권세와 버금가는 권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애굽 백성들과 이스라엘 민족들과 열방의 생명을 구원하는 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요셉은 은혜 주고 싶은 사람, 은혜 주는 재미가 쏠쏠한 사람이었다. 노예였을 때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줬더니 섬김으로 반응했다. 예배하듯이 하나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한 단계 높여 가정총무로 세웠을 때도 신실한 모습으로 섬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감옥에 넣었지만 그곳에서도 섬겼다. 왕 다음 자리인 총리로 세웠더니 이번에도 여전히 백성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듯 섬겼기에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 풍성케 하는 자로 세워주셨다.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에서 가르쳐주셨듯이 섬김은 크고 작음이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내가 누군가를 섬기고 있는가? 이게 중요하다. 골로새서 3장에서 바울이 고백했듯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는 말씀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섬겨야 한다. 이런 섬김은 요셉을 통해 보여주신 것과 같이 우리의 섬김과 하나님의 복(상)은 상호작용하며 발전하여 점점 더 큰 섬김으로, 점점 더 큰 은혜로 나타날 것이다.
 
오늘의 기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며 섬기겠습니다. 잘 섬길 수 있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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