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정 예배

4월 22일~27일 가정 예배

ree610 2024. 4. 21. 15:39

구원에 이르는 믿음
본문 : 마 25:31~46
찬송 : 521장
 
구약 성경의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사이클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다가 시간이 흐르면 신앙이 나태해진다. 그러면 하나님과 멀어져 말씀을 버리고 죄악과 타협하게 된다.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신다. 그 후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한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 가운데 회복된다. 이것을 사사기 사이클이라고 한다. 2000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생활도 패턴을 갖는 것 같다. 신앙의 박해와 고난 속에 있을 때에는 천국을 소망하고 주의 재림을 고대한다. 이에 비해 현실의 삶이 평안하고 풍족할 때에는 내세의 소망이나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관심과 소망이 희미해진다. 그러나 성도는 늘 깨어 있어 구원의 길을 가야만 한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가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하셨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그러한 믿음이 마음과 입술에만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에서 행함으로 입증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생에 들어갈 의인의 무리와 영벌에 처해질 악인들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가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주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영생과 영벌에 들어갈 자로서 구분하는 주님의 기준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이웃이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는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주어 입혔는가, 병들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찾아가 보살펴 주었는가로 기준을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일 뿐 우리의 공로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의 은총을 입은 성도는 구원받은 자다운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야 할 필수적인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 물으신다. 만일 우리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이웃에게 필요를 공급하는 이웃 사랑의 디아코니아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고, 다 헛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디아코니아적인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오늘의 기도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구원 받은 자 다운 삶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청하여 오너라
본문 : 마 22:1~14
찬송 : 328장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잔치를 베푼 임금을 천국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말씀의 초점은 혼인잔치를 베풀고 초대하고 있는 임금에게 있다. 천국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임금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임금은 혼인잔치를 성사시키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임금은 잔치에 참여할 사람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임금은 3차에 걸쳐 사람들을 초대했다. 이미 오래 전 그들에게 일시와 장소를 전달하고 초청장도 보냈다. 당일이 되어서 다시 한번 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들이 거부하자 세 번째로 종들을 보내면서 "오소서"라는 간곡한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다.

둘째, 임금은 오래 전부터 잔치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했다. 임금은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음식을 차리는 데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았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오기를 싫어했다. 보낸 종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 그러자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그리고 임금은 "그 사람들은 청함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종들을 사거리로 보내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라"고 명했다. 임금의 이러한 행동들은 아들의 혼인잔치를 반드시 해야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고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임금은 혼인잔치에 필요한 예복을 준비해 입게 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잔치에서 추방됐다. 이것이 혼인잔치를 준비한 임금의 마음이었다. 임금이 혼인잔치를 이렇게 진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아들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이 비유가 천국비유일까? 임금 때문이다. 비유에 나타나는 임금은 천국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오늘도 그들에게로 보내시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말씀으로 인도하신다
본문 : 시 1:1~3
찬송 : 204장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와 함께 교회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교회생활이 너무 좋았고 중학교 때에 방언을 받고 성령체험을 했다. 학교에서는 단 한번도 회장을 못했지만 교회에서는 회장을 했다. 학생부가 50여명에서 300명으로 부흥하기도 했다. 빡빡 깎은 중학교 학생이 새벽예배에 오니 목사님이 까까머리를 만져주시고 기도해주시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고등학교 2학년때 소명을 받아 주님 앞에서 가장 가치 높은 일이 목사의 사역임을 알게 하셨다.

그런데, 목사가 된다고 하였을 때, 부모님이 결사반대하셔서 일반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문제는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신앙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던 전도사님은 다른 임지로 가버렸고 예배 때 목사님 설교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어느새 목사님이 시키면 순종하지 않는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해병대를 제대하고 보니 후배들이 오히려 믿음이 많이 성장해서 필자에게 권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던 사이 아버지가 풍이 들고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겹치면서 교회 일에 더 소홀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 가정과 나의 삶이 왜 이토록 황폐해졌는가?'라며,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을 떠난다고 하니 지금까지 믿었던 게 아까워서 25살에 부산 근교의 무척산 기도원에 혼자 올라갔다. 그곳은 중고등학교 시절 항상 가던 겨울 수련회 장소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시오. 제 앞에 나타나시던지, 음성을 들려주시던지, 손을 잡아 주시는 느낌이라도 주셔야지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으로 알고 저는 교회에 안다니겠습니다'라고 울며 기도했다.

토요일 새벽까지 하나님은 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일어설려는 순간, 토요일 새벽 4시경에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셨다. '네가 나를 만나고 내 뜻을 알려면 성경 말씀을 봐라 그 안에 나의 뜻이 다 들어 있다 말씀으로 너를 인도하리라'는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고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했다. 그때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큐티를 하고 말씀을 통독하면서 꿀송이처럼 말씀이 달게 여겨졌다. 그렇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신다. 세밀하게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말씀을 통하여 당신과 당신의 가정이 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용기와 희망을 주는 그런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말씀을 통해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살고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우리의 복된 미래
본문 : 창 12:1~9
찬송 : 358장
 
흔히들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미래는 투명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매일 같이 전진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미래를 아브람에게도 정해 놓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우리에게도 세밀하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는 나의 미래도 미리 준비하셔 밝은 미래를 보장해 놓으셨다.

첫째,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이 살고 있는 땅은 어려서부터 자라나고 성장한 곳이기에 열심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고향이요 친척들이 있는 땅이다. 그러나 주님이 보여 주시는 땅은 미지의 세계이긴 하지만 새로운 능력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땅은 희망과 번성이 약속된 곳이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아주 좋은 곳이다. 우리는 주님이 보여 주시는 곳을 하나님과 일치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현재의 삶이 비록 힘들다고 할지라도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전진하자.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인하여 새로운 희망찬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둘째,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곳을 믿음으로 비전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거기는 큰 민족을 이루는 곳이 될 곳이라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지금은 비록 나이도 많고 불가능한 것 같아 보이나 지금은 한 사람에 불과한 입장이나 앞으로는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여 나의 이름이 현재는 무명하지만 앞으로는 유명한 이름을 갖게 되어 많은 사람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복이 될지라 하셨다. 비록 나의 현재의 삶이 미흡하고 부족하고 무명한 삶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곳에 이르면 준비된 복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복된 성도이기 때문이다.

셋째,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모든 인생의 복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복을 창조하시고 나눠주시며 누리게 하신다. 이러한 복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서 그 복이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하신다. 사람을 축복하면 그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복의 근원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복을 가진 사람이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큰 복을 받게 될 줄 확신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아브람이 받았던 그 복을 지금도 받을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큰 복이 넘치게 될 줄 확신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곳을 바라보게 하시고 이루어질 줄 믿고 나아가는 확신을 갖게 하소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하여 번성하고 나로 말미암아 우리가 바로 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열 두 기념돌
본문 : 수 4:10~24
찬송 : 434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요단을 건너는 참으로 길이 기억될 만한 기적적인 은혜를 경험한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상징하는 언약궤의 세 위치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
여호수아 3장 11절을 보면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나니"라고 했다.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2000 규빗 앞에서 언약궤를 매고 가는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은 우리 앞서 가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신다. 그 요단강처럼 위험한 우리들의 인생길이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앞서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늘 예배가 삶의 우선순위가 되고 어떤 결정도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야 할 것이며 어떤 사역도 말씀보다 앞서지 않아야 한다. 주의 말씀 속에서 은혜 받고 부어주신 주의 심장으로 열정을 다해 사역할 때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4장 10절을 보면 "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 서 있고 백성은 속히 건너갔으며"라고 했다. 앞서 인도하던 언약궤가 강 가운데 멈춰 서 있으므로 온 백성들이 속히 그리고 안전하게 그 요단강을 건너간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는 내 삶의 복판에 임하시어 그 모든 위협을 친히 막아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산성이시며 누구도 틈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나의 불 성곽, 피난처, 도피성이 되신다.

호위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 4장 18절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고 했다. 이번엔 언약궤의 위치가 백성들의 행렬 맨 뒤쪽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안전히 건너도록 뒤에서 호위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호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요단강을 넉넉히 건널 수 있었다. 행렬 맨 뒤에 섰을 가능성이 높은 노약자들 중에서 한 사람도 물 가운데 빠진 사람 없었다. 아무리 약한 인생이라도 주님 친히 호위하시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 첫 성인 길갈에 이르게 되었다.

요단의 이 기적을 기념하게 하시고 훗날 자손들이 물을 때 여호와께서 여리고 물을 마르게 하사 건너게 하신 것으로 알게 하려고 요단에서 가지고 온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기념 돌을 길갈에 세우게 하신다. 우리 매일의 삶에도 크고 작은 이런 기억의 돌들이 더욱 풍성하게 세워지기 원한다.

오늘의 기도
늘 우리 앞서 가시고 나의 삶 한복판에 임하여 함께 하시고 때로 등 뒤에서 호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 하루도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념하는 복된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인생의 3가지 원수
본문 : 막 4:1~9
찬송 : 191장
 
어느 방송에서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하루 30분독서, 메모습관, 1주 4회 운동, 한 달 10시간 봉사 항목으로 체크했다. 부자는 70~80%, 빈자는 20~23%만이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 역시 외적인 환경보다는 근본적인 습관이 더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천로역정'에서 기독자는 수 없는 원수들 곧 길바닥, 바윗돌, 가시덤불 같은 외적환경을 지나서 천성에 도착했다. 인생의 원수는 역시나 돈이나 사람이나 어떤 일 같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었다. 본문은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첫째 원수는 길바닥 같은 자기 기준이다. 존 번연은 본문을 읽다가 자기 마음이 길바닥 같아 말씀을 다 빼앗겼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길가는 말씀을 들을 때 마귀가 구원 얻지 못하도록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길가는 전통 곧, 유전과 철학이었다. 죄인들은 자기생각, 자기결정, 자기신앙 곧 자기기준이 어느 덧 길가처럼 단단하여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한다. 부부갈등 78%가 자기생각이 원인이다. 서로 자기 자(尺)에 상대를 맞추려다가 싸움이 일어난다. 행복한 인생은 외적인 조건, 자기기준을 내려놓고, 내적조건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말씀이다.

둘째 원수는 돌밭 같은 자기감정이다. 돌밭의 특징은 흙이 얇아 뿌리를 내릴 수 없어 마르게 한다. 말씀 선포할 때 '아멘!' 화답하지만, 말씀의 열매가 없는 것은 흙이 얕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값싼 은혜다. 국내 거주 외국인들은 한국인을 과거 지향적(군대, 정치이야기), 핑계(자기반성 무), 인간관계 빈약(상대에게 질 줄을 모름) 등으로 평가했다. 이것은 마치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기에 환난이나 핍박에 넘어지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신앙에서 뿌리가 필요한 것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기 때문이다.

셋째 원수는 가시떨기 같은 자기연민이다. 길가 굳은 땅이나 돌밭은 외적인 어려움이라면 가시떨기밭은 세상 염려, 재물 유혹, 자기 욕심이라는 내적 요소이기에 더 어려운 환경이다. 세상은 오늘도 현실에서 환상 속으로 빠지게 하지만, 말씀은 환상에서 현실을 바로 직시하게 만든다. 세상은 온갖 문화를 통해 죄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 하지만, 말씀은 죄란 궁극적으로 죽음을 가져오기에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 부자청년은 자신을 위해선 충실했지만,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세상을 향한 자기 연민에 빠져, 왼편에 속한 자처럼 하늘같은 이웃을 포기했던 것이다.

오늘의 기도
길가 같은 자기 기준, 돌밭 같은 자기감정, 가시밭 같은 자기연민을 말씀으로 이겨 좋은 땅에 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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