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정 예배

1월 15일 ~ 20일 가정예배

ree610 2024. 1. 11. 16:19

- 존경받는 성도
본문 : 마 13:53~58
찬송 : 420장

 

요즘 기독교에 대한 사회에서의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은 사회를 향해 섬김 헌신 심지어 순교까지 당하며 신앙을 지켜온 길이었다. 오늘날 성도의 모습 역시 이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 몇 가지를 실천하자.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셔서도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치셨음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시고 오히려 배척을 받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명이신 복음을 가르치는 일에 망설이지 않고 감당하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따라서 때로는 배척하는 자리에서 복음 전파에 힘쓸 때 결과적으로 존경받는 성도가 될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한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을까 하는 놀람이었다. 이런 역사는 하나님께로부터 깨달은 진리를 전달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피상적인 성경 지식을 전달하는 성도들이 아니라 깊이 깨달은 말씀, 영적으로 체험한 말씀을 전할 때 이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고 그에 대한 평가는 대단한 지혜와 능력을 소유한 자로 인정되어 존경받는 성도가 될 것이다.
셋째로 전도자가 나에 대해 지난날의 상황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을 수도 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까지 함께 지내며 알던 평범한 사람 어떤 방면에서는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배척을 받으셨다. 그럴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셨다.
넷째로 선지자는 즉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기의 과거 모습만 기억하고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특히 고향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할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할 곳이 없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즉 내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전해 준 것이 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된 피전도자에게 훗날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고정관념을 바꾸는 삶을 살 때 존경받는 사람이 됨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사람, 평범한 청년으로만 알고 있었다. 공생애를 펼쳐 가시는 메시아 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도 부정적인 사람으로 인식된 사람들에 대해서 새해에 달라질 모습을 기대하지 않고 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새해에는 아름답게 달라질 모습을 기대하며 그를 위해 더욱 기도와 응원하는 삶이 바람직한 성도의 삶이다.

오늘의 기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을 향해 열린 마음을 소유하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섬기자
본문 : 요 13:12~17
찬송 : 505장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서로의 허물을 들추고 비난하기보다는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상대방의 장점을 칭찬함으로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은 가장 완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으며 또한 그런 사랑을 하며 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는데,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시며 말씀만 하심이 아니라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셨다. 이제 우리가 그 크신 사랑을 받았으니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선한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더욱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실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시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말씀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을 팔게 될 가룟유다에게 끝까지 친절을 베푸시며 떡을 떼어 그에게 주셨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시며 사랑의 폭을 넓히도록 하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랑의 대상을 내게 좋은 사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만 정한다면 예수님께 칭찬받을 일도 못되고, 여기에서 편견과 편애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본 받아 기쁨으로 섬기며,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열매 맺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팔려는 가룟유다의 악한 마음을 알고도 그의 체면과 생명을 생각하시고 그 흉계를 끝까지 숨기심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요, 한 사람이라도 회개함으로 멸망에 이르지 않기를 원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사랑 때문이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세상에 나아가 사랑과 행복의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교회와 성도가 되자.

오늘의 기도
참 사랑의 본을 보여주시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게 하신 주님, 사랑의 대상을 고르지 않게 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여 행복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거룩한 교회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본문 : 마 6:31~34
찬송 : 552장

 

사람들은 각자의 새해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소망의 내용이 다르다. 우리의 소망은 내가 원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먼저다. 그것을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이 세상을 가장 잘 살아가는 비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기 때문이고 또 그것을 먼저 구하면 나머지 다른 것들은 다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새해를 복된 새해로 만들려면 우리는 내 소망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제화 하는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여전히 본문에 나오는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어떤 의미일까? 대개는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먼저 기도하고 그 다음에 우리 개인적 필요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일에 직면하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날마다 순간마다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간순간 경험되는 상황 속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안 좋을 수 있다. 오늘 좋은 것이 내일 안 좋을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는 좋은데 또 다른 면에서는 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매 순간 주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선택하게 하시고 그 일을 위해 사용 받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다른 것들은 자연히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기도가 호흡이라고 했는데 이런 점에서도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소망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들이 분명히 이루어지게 하는 비결이 있다. 무엇을 하든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2018년은 이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이 말씀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역사하시는 그분의 지극히 현실적인 약속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내 기준과 내 생각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하소서. 이 고백이 관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순간순간의 삶으로 살아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일어나 빛을 발하라
본문 : 사 60:1~3
찬송 : 550장

 

여름철 불빛을 보고 나방이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방 못지 않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있다. 빛이 있는 곳이다. 오늘날 청정 자연이 보존된 관광지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추세이다. 일본 대마도를 갔더니 사람들이 참 많았다. 하루에도 부산에서 대마도로 오는 사람들이 2500여 명 정도나 된다고 한다. 대마도로 사람들이 모여든 주된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마도의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된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대마도는 특별한 자원이 없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대마도 영주가 조선땅에 대마도를 편입시켜달라고 요청해 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은 이를 거절한다. 대마도는 아무 도움이 안되고 돈을 들여서 돌봐야만 하는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마도는 관광산업으로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대마도가 자연 보존을 잘하는 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도 돌아와서 확인한 예루살렘 땅은 광야요  폐허였다. 거룩한 예루살렘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백성들은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이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고 이 예루살렘에 재물이 몰려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이 어둡고 캄캄하여 앞뒤가 보이지 않는 혼돈에 빠질 것이지만 예루살렘이 빛을 받아 대낮처럼 밝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루살렘이 빛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어 새로운 빛을 비추는 존재로 거듭날 것이라고 한다.
황무지와 같은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몰려올 수 있는가?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재물을 놓고 갈 수 있는가?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특색있는 곳으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황무지와 광야같은 예루살렘이 어떤 특색을 가질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머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특색있는 장소로 바뀌는 것은 그곳을 하나님 붙잡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특색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교회와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교회와 민족에게 머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나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왕은 마른 뼈같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면 사막도 샘물이 넘치는 곳이 된다. 우리가 말씀의 빛을 발할 수 있을 때에 우리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영적 청정지역이 되게 하여 주세요. 그리하여 우리에게 사람들이 모여 들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말씀을 듣고 반응하자
본문 : 삼상 3:1~10
찬송 : 366장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전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 사무엘을 그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고 응답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기갈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첫째,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엘리 제사장은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통로가 막혀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땅히 아비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삼상 3:13) 죄는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가 막혀 생명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 굶주림을 겪게 된다. 영적 굶주림은 영적기능을 둔화시킨다. 범죄한 아들의 죄를 꾸짖는데 단호하지 못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았다. 결과는 말씀을 들려주실 대상이 교체된다. 결국 제사장이 들어야 할 말씀은 사무엘에게로 향한다.
둘째,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전 안에 누웠고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사무엘도 처음엔 하나님의 소리로 분별하지 못하고 엘리의 목소리로 착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응답할 때까지 말씀하셨다.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앞에 엎드려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어떤 처소에 자리하는 가는 참 중요하다. 엘리는 자신의 처소에 누웠다. 그 이유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함이라고 설명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처한 장소는 어디인가? 시력을 잃어가는 자리인가? 아니면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법궤 앞에 있는가?
셋째, 말씀이 들려지는 환경을 가꾸자. 우리의 영적 실체가 어두워져가고 열정을 잃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권이 무너진다. 민감하게 깨닫던 영적 감성이 무디어지면 아무 것도 기능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등이고 길의 빛이기에 그렇다. 아모스는 이렇게 말씀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 기갈"임을 선포하신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장악해 가도록 믿음의 환경을 가꾸어가자. 그 환경은 은혜의 환경이다. 그 은혜는(엡 2:8) 우리의 본질을 바꾸어주셨다. 주님의 은혜의 이끄심으로 하늘 나그네길을 즐겁게 가자. 주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영적 귀의 데시빌을 잘 맞추어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사무엘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자리에 있게 하시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베드로, 마르다, 도마
본문 : 마 16:13~20
찬송 : 407장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둘째,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이다.
첫째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세 가지 '금'을 주셨다. 황금과 소금과 '지금'이라는 시간을 주셨다. 황금은 물질과 부귀영화, 왕권을 상징한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세 가지 예물을 가지고 왔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다. 황금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드린 예물이며, 유향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께 드린 예물이고, 몰약은 영원히 썩지않을 말씀을 선포하신 선지자 예수님께 드린 예물이다.
소금은 모든 음식물과 요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핵심 조미료이다. 아무리 맛있는 한우 등심도 소금이 없으면 두 세점 이상 먹기 힘들다. 싱거우면 그렇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것은 2%의 염분 때문이다. 가장 건강한 혈액은 0.9%의 염분도를 함유한 혈액이다. 하지만 황금보다도 그리고 소금보다도 더 중요한 '금'이 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증거,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다. 나의 남편과 아내, 자녀들 그리고 부모형제들,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우들, 친구들, 직장동료들이다.
셋째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위의 세 가지 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질문 하나가 있으니 바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이다. 베드로와 마르다와 도마의 공통점이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수님의 질문에 확실한 신앙고백을 했다는 공통점이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다. 의심많은 도마는 손가락을 내밀어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 보고는 이렇게 외쳤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는 복된 자들이다. 보지 못해도 믿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주는 그리시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오니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평강, 땅의 기름진 산업과 물권으로 축복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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