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출판계가 불황인 건 현상적으론 책이 안 팔리기 때문이지만, 본질적으론 미디어 지형이 변했기 때문이다. 변화된 미디어 환경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콘텐츠와 미디어가 분리되면서 콘텐츠의 값이 싸지고, 생산․유통․소비 속도가 빨라졌다는 점이다. 반면 책이라는 매체는 여전히 비싸고, 생산․유통․소비 속도도 너무 느리다. 이 불일치가 지금 출판 위기의 본질이다. 출판계가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지식을 독자들에게 빠르고 값싸게 제공할 수 있도록 다양한 생산․유통의 방법을 발명해 내야 한다. 모든 자원을 종이책의 생산과 서점 유통에만 투여하고 있는 지금의 출판시스템은 확실히 중복 과잉투자다. 중복 과잉투자의 결과가 어떤지는 자본주의 역사가 이미 충분히 보여 주지 않았던가.
위기일수록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불황을 뚫고 출판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4P(Product, Price, Place, Promotion) 원칙에 의거해 과학적으로 출판을 경영해야 한다. 그린비 출판사의 경우 4P에 입각한 경영을 함으로써 올해도 크진 않지만 성장을 했다. 특히 올해의 경우, 뉴미디어적 실험을 하면서 성장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지금 왜 뉴미디어적 실험이 중요한가. 지금은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가 공존하면서 투쟁하는 출판의 이행기다. 이행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적 출판 행위에 미래적 요소, 즉 뉴미디어적 요소가 담겨 있어야 한다. 미래적 요소가 담겨 있지 않는 한 미래의 것은 결코 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처럼 책이라는 올드미디어에만 집착해서 우리의 출판행위를 낡은 것으로 만드는 한, 출판 불황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지금 시기는 역설적이지만, “책을 죽여야 책이 사는” 시기다. 아래에서는 우리 출판사의 경험을 4P 중심으로 얘기해 보겠다.
1. Product(제품)
지금은 평생학습시대고, 천인천색의 시대고, 롱테일법칙이 지배하는 시대다. 앞으로 출판은 다품종소량생산방식이 트렌드고, 출판사는 이러한 트렌드에 빠르게 적응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많은 출판사들이 서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제살깎기식 출혈경쟁을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출판계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여전히 베스트셀러 중심의 소품종대량생산방식임을 보여준다. 앞으로의 출판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전문성과 방향성을 유지하면서 1년에 일정 종수 이상의 책을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한다.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 풍부한 콘텐츠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다매체시대에 콘텐츠 변용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우리 출판사는 웹팀을 두어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강화했다. 웹팀에서는 동영상 카메라를 구입해 우리 저자가 하는 강의 50여 개를 동영상으로 찍었다. 내년부터 독자들은 그린비 홈페이지에서 동영상 콘텐츠 서비스를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저자나 역자의 책이 나오면 독자들을 모아 공개강의를 할 예정이고, 그것을 동영상으로 만든 다음 약간의 편집을 해 저렴한 요금으로 서비스할 계획이다. 동영상 가운데 일부는 미리보기 형태로 독자들에게 제공되어 책의 홍보에 이용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금 추진하고 대형문고 기획은 아예 기획에 맞춰 책이 나오기 전에 오프라인 강의를 꾸렸으며, 이를 동영상으로 찍고 있다. 책이 나오면 이미 찍어 놓은 강의 동영상과 함께 독자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product가 꼭 책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독자가 구매하는 것은 그것이 책이건, e북이건, 동영상이건, 그밖에 다른 어떤 미디어 형태이건 ‘솔루션’으로서의 텍스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Price(책값)
지금 책값은 비싸다. 비싼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소비자들이 지식과 정보를 저렴하게 혹은 공짜로 얻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종이책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출판 시스템 때문으로, 원자재, 편집, 인쇄, 제본, 물류 등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책값은 기본적으로 지식의 크기 값인데, 부대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다. 이런 출판시스템은 저자와 독자의 원활한 재생산을 가로막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해 결국 출판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밖에 30%를 상회하는 반품율, 지나치게 낮은 서점 공급률, 협소한 유통망에 따른 과다한 재고율 등도 책값 인하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
책값을 낮추고 출판사 이익률을 높이기 위한 해결책은 세 가지다. 첫째, 재고율, 반품율, 공급률을 적절하게 콘트롤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둘째, 책값은 독자가 납득하고 기꺼이 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가격, 그런 예민한 경계선에서 책정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책의 생산비용을 최대한 낮출 수 있는 혁신적 발상이 필요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없애거나 줄이고, 책의 편집과정을 표준화․모듈화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책 제작과정에 POD를 도입해야 한다. 셋째는 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책 이외에 좀더 값싼 다른 미디어 방식으로 독자들이 콘텐츠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책을 포함한 다양한 미디어 방식으로 콘텐츠를 공급하는 것은 출판사뿐만 아니라 저자에게도 이익이다. 저자에게 책의 인세 외에 강의나 동영상 서비스 등의 다양한 루트를 통해 수입이 생긴다면 좀더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3. Place(유통)
지금 출판유통은 서점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사들은 서점에서 경쟁우위를 점하기 위해 과도한 푸시(push) 마케팅을 하고 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급률 인하는 물론 값비싼 광고 비용과 이벤트 비용을 치르고 있다. 이래서는 일부 베스트셀러를 제외하고는 매출이 늘더라도 이익이 나질 않는다. 이런 낮은 이익 구조에서는 저자와 독자 재생산을 위한 장기 투자를 할 수 없다. 지금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유통 현실은 확실히 출판사와 서점이 공모한 결과지만, 여기에서 내탓, 네탓을 따지는 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통 문제 해결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지금까지의 서점 거래 관행을 개혁해야 한다. 지금 서점과 출판사의 거래에서 기본 골격을 이루는 것은 가격할인과 그를 위한 낮은 공급률이다. 서점도 출판사도 오로지 가격할인 외에는 다른 강력한 마케팅 방법을 창안해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마케팅 모델이 필요하다. 우리 출판사가 최근 알라딘 서점에서 다섯 군데 출판사와 함께 <리뷰 한국사회>라는 특강을 진행했는데, 서점 홍보도 잘 되었고, 책 판매도 잘된 편이다. 물론 독자 반응도 뜨거운 편이었다. 출판사와 서점 모두 가격할인의 경쟁틀에서 벗어나 다른 마케팅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이런 상상력과 기획력에 바탕을 둔 차별화된 마케팅 경험의 누적이 출판사와 서점 모두에게 요구된다. 이럴 때만 낮은 공급률을 강요하는 구조도 바뀔 수 있다. 또 하나 특정 서점의 파워가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것을 견제하려면 서점 수를 늘려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서점 수가 늘기만 해선 지금의 사태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점 수가 아무리 늘어나도 서점들은 여전히 돈이 될 만한 책 위주로 진열 판매를 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바잉파워가 있는 소수의 대형서점에 출판사들은 또다시 줄서기를 해야 할 것이다. 서점 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전문화되고 특성화된 서점이다. 책을 가장 잘 아는 곳은 출판사다. 그런 만큼 출판사들이 직영하는 전문서점은 지금 시점에서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한 사업 아이템이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전문성만 있으면 서점을 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다. 전문서점이라면 설령 오프라인 매장이 작더라도 인터넷 서점을 함께 하기 때문에 구색 면에서 그 어떤 대형서점에도 밀리지 않는다. 책을 쓴 저자가 출판사가 직영하는 서점에서 직접 독자와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강의도 하면서 독자를 책의 세계로 유혹한다면, 왜 경쟁력이 없겠는가. 다시 문제는 출판사의 전문성 문제다. 생산과 유통, 소비를 하나로 잇는 출판네트워크 속에서 내 저자와 내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갖고 있다면 출판의 성장동력 확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서점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 다양한 비-서점 유통 방식을 창안해 내는 것도 중요하다. 때론 사서 보고, 때론 빌려 보고, 때론 다운로드해서 보는 식으로, 독자들이 보다 싸고 보다 편리하게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도록 유통망을 다각화해야 한다. 다시 문제는 독자를 찾아가는 출판사들의 마케팅 상상력이고 기획력이다.
4. Promotion(프로모션)
출판을 잘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제품을 잘 만들고, 그 책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확실히 알리면” 된다. 문제는 이 “알리는”것, 즉 프로모션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출판인들이 책은 어찌어찌 잘 만들 수 있겠는데, 프로모션은 도통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면서 대개는 광고에 의존해 프로모션을 한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광고는 효과를 측정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프로모션’은 소비자 언어로 정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이다. 독자들은 일방향의 홍보용 메시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품을 중심으로 쌍방향으로 커뮤니케이션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모션을 제대로 하려면 아주 좁게 타겟팅된 내 독자에게 책의 존재를 알리고 그 책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차별화된 방법이 필요하다. 우리 출판사의 경우 웹팀을 두어 ‘우리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일상화하고 있다. 블로그를 통해 독자와 함께 나눌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고 각종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유의미한 데이터를 하나하나 축적해 나가고 있다. 1년 정도 꾸준히 블로그를 운영한 결과 정기 구독자가 200명을 넘었으며, 하루 방문자도 천명을 넘어섰다. 우리 목표는 5만명 정도의 인문사회과학 독자와 일상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목표다. 이들을 상대로 우리 책의 존재를 확실히 알리면 프로모션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프로모션을 위해 전문 웹팀을 둬야 한다고 말하면 흔히 회사 규모나 비용 문제를 얘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인드다. 사실 지금 조건에서 인터넷 서점 두세 곳에 배너 광고 하고, 신문 광고 한두 번 하면 광고 예산이 2천만원을 훌쩍 넘는다. 효과도 불투명한 이런 예산을 철저히 줄이면 웹마케팅 부서를 두고 저자․독자와 직접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프로모션을 할 수 있다.
많은 출판사들이 너무도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출판을 하고 있다. 불황기일수록 예측가능한 경영을 해야 한다. 위에서 얘기한 4P 중심의 출판 경영은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최대한 제거하고, 통제 가능한 상수 중심으로 이익에 기반한 성장 경영을 하자는 것이다. 출판은 결코 책 한 권 크게 터져야만 성장을 하는 그런 사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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