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삶

겨울 새벽의 기상 나팔

ree610 2004. 7. 30. 09:35

기상 30분 전이 되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친구를 깨워줍니다. 부드러운 손찌검으로 조용히 깨워줍니다. 그는 새벽마다 기상 나팔을 불러 나가는 교도소의 나팔수입니다.

옷, 양말, 모자 등을 챙겨서 갖춘 다음 한 손에는 '마우스피스'를 감싸쥐어 손바닥의 온기로 데우며 다른 손에는 나팔과, 기상 나팔 후부터 개방(開房) 나팔 때까지 서서 읽을 책 한 권 받쳐들고 방을 나갑니다. 몇 개의 외등(外燈)으로 군데군데 어둠이 탈색된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교회당 계단을 꺾어올라 높다란 2층 창 앞에 서서 나팔을 붑니다. 가슴에 맺힌 한숨 가누어서 별빛 얼어붙은 새벽 하늘에 뿜어냅니다. 성씨 다른 아버지께 엽서를 띄우는, 엄마 불쌍해서 돈 벌어야겠다는…… 농()돌이, 공()돌이, 이제는 스물다섯 징()돌이……. 얼어붙은 새벽 하늘을 가르고, 고달픈 재소자들의 꿈을 찢고, 또 하루의 징역을 외치는 겨울 새벽의 기상 나팔은 '강철로 된 소리'입니다.

교도소의 문화가 침묵의 문화라면 교도소의 예술은 비극미(悲劇美)의 추구에 있습니다. 전장에서 쓰러진 병정이 그 주검을 말가죽에 싸듯이 상처난 청춘을 푸른 수의에 싸고 있는 이 끝동네 사람들은 예외 없이 비극의 임자들입니다.

검은 머리 잘라서 땅에 뿌리고, 우러러볼 청천 하늘 한 자락 없이, 오늘밤 두들겨볼 대문도 없이, 간 꺼내어 쪽박에 담고 밸 꺼내어 오지랖에 싸고,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냐며 삶 그 전체를 질문하는, 검푸른 비극의 임자들입니다. 비극이, 더욱이 이처럼 엄청난 비극이 미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정직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한테 가해지는 중압을 아무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고스란히 짐질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의 '정직함'에 있습니다. 비극은 남의 것을 대신 체험할 수 없고 단지 자기 것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의 서술이라는 특질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특질이 그 극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종내에는 새로운 '앎' ― '아름다움' ― 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비극은 우리들이 무심히 흘려버리고 있는 일상생활이 얼마나 치열한 갈등과 복잡한 얼개를 그 내부에 감추고 있는가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객석으로부터 무대의 뒤편 분장실로 인도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식평면(認識平面)을 열어줍니다.

열락(悅樂)이 사람의 마음을 살찌게 하되 그 뒤에다 '모름다움'을 타버린 재로 남김에 비하여 슬픔은 채식(菜食)처럼 사람의 생각을 맑게 함으로써 그 복판에 '아름다움'[]을 일으켜놓습니다. 야심성유휘(夜深星愈輝), 밤 깊을수록 광채를 더하는 별빛은 겨울 밤하늘의 '지성'이며, 상국설매(霜菊雪梅), 된서리 속의 황국(黃菊)도, 풍설(風雪) 속의 한매(寒梅)도 그 미의 본질은 다름아닌 비극성에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구태여 비극을 미화하고 비극미를 기리는 까닭은, 한갓되이 비극의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작은 사랑'(warm heart)에서가 아니라, 비극의 그 비정한 깊이를 자각케 함으로써 '새로운 앎'(cool head)을 터득하고자 한 오의(奧義)를 알 듯합니다.

그러나 기상 30분 전 곤히 잠든 친구를 깨울 적마다 나는 망설여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포근히 몸 담고 있는 꿈의 보금자리를 헐어버리고 참담한 징역의 현실로 끌어내는 나의 손길은 두번 세번 망설여집니다.

새해란 실상 면면한 세월의 똑같은 한 토막이라 하여 1월을 13월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새로움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던져진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움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모든 새로움은 그에 임하는 우리의 심기(心機)가 새롭고, 그 속에 새로운 것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새로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8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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