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절 106주년기념 주일예배 설교 :
예수의 세 가지 시험과 3.1운동 (신 26:1-11, 롬 10:8b-13, 눅 4:1-13)

* 시험과 희망의 시간
오늘 우리는 사순절 첫 번째 주일, 3.1절 106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과 3.1운동에 담긴 주요 정신을 묵상하며,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단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척박한 삶의 자리인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악마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 시험은 단순히 예수께만 배타적으로 부과되었던 시험이 아니라, 인류 역사 가운데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부과되었던 시험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역시 수시로 맞닥뜨리는 시험입니다. 사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시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시험은 오히려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것은 그 시험을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시험을 이길 수 있고, 나아가 그 시험으로 인해서 보다 성숙한 삶의 자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은 우리 겨레가 일제의 야만적인 억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며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3.1운동의 동기와 목적, 그 실천의 방법은 3.1독립선언서에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무엇보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일본 정부에 독립을 청원하자는 개신교 대표들과 달리 당당히 선언하자는 천도교 대표들의 목소리가 주축이었습니다. 포악한 일본 정부를 향해서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안전하고 비폭력 운동 의지를 확고히 하는 측면일 수 있었지만, 의견의 진술 정도에 머물기보다는 민족자결의 의사를 적극 표현하자는 천도교 측의 주장이 개신교 측 인사들에게 수용되었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은 처음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운동이 아니라 민족의 정당한 권리를 평화롭게 요구하는 비폭력 운동이었습니다. 독립 자체보다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모든 국가와 민족이 평화의 세상을 더불어 누리는 것에 목적을 두었기에 아시아의 약소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 예수의 세 가지 시험
교회력에 의한 복음서 말씀 누가복음 4장에 기록된 예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유혹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돌로 빵을 만들라는 시험입니다. 악마는 40일을 금식하며 자신의 사명과 과제가 무엇인지 씨름하는 예수께 다가와서 돌로 빵을 만들어 배고픔을 해결하라고 유혹합니다. 이는 사람의 생물학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해.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어. 천하장사라도 먹지 않으면 힘쓸 수 없잖아. 굶주린 상태의 사람이 먹을 것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일단 먹고 살아야 의미 있는 일도 할 수 있어.”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먹는 것 다음의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먹는 것에만 안주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먹는 것보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 존재 의미가 더욱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궁극적인 목적, 존재 의미를 확인하지 않고, 우선 먹고 보자는 식으로 먹을 것만 찾는 사람이라면, 동물적 존재와 차별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개 먹을 것만 우선으로 찾는 사람은 삶의 적당한 양에 머물지 않고,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찾게 되고, 오늘에 만족하기보다는 ‘내일’까지 염려하며 살아가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마 6:33)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조차 도구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둘째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얻기 위해서 악마에게 절하라는 시험입니다. 악마는 예수께 세상 모든 나라를 보여준 후에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줄 테니 자기에게 굴복하라고 유혹합니다. 이는 권력과 명예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라는 것으로 사람의 사회적 욕구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야. 너는 특별해. 보통 사람들과 다른 네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세상이 계급과 계층, 빈부 등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야. 그런데 각자의 차이와 능력에 상응한 대접을 하지 않고 기계적인 평등을 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공정한 것임을 알아야 해.” 악마에게 절한다는 것은 이러한 유혹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악마의 유혹을 거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존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종도, 성별도, 지식의 유무도, 빈부의 수준도, 건강의 정도도 차별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분은 누구라도 당신만큼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세상의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 아래 굴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5-27)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들을 섬기려 하기보다 제자들처럼 높은 자리만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셋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그곳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보호할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인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유혹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처럼 살라는 것으로 사람의 종교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시험은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받은 시험과 동일합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창 3:5) 사람은 스스로 선과 악을 규정할 수 없는 존재, 아니 스스로 선악을 규정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선악의 궁극적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이고,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뜻에 상응한 것을 선으로, 거스르는 것을 악으로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사람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마는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없어. 네가 하나님이야. 없는 하나님을 있는 하나님으로 상정하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너의 삶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일 뿐이라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구,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야. 네 자신이 너의 주인이니 마음대로 살아.”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마를 향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상대적인 사람이 절대자 하나님이 되어 선악을 임의로 규정하거나 임의로 판단하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처럼 되는 순간, 목소리가 큰 자, 힘이 센 자, 돈이 많은 자, 건강한 자, 다수자가 선이 되고, 목소리가 작은 자, 힘이 약한 자, 돈이 없는 자, 병든 자, 소수자가 악으로 규정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절대자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절대자 하나님이 되어서 다른 이들을 임의로 판단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세 가지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3.1독립선언서의 꿈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는 예수께서 이겨내신 세 가지 시험에 그대로 굴복했음을 우리는 당시 역사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조선을 병합한 후 토지개혁의 미명 아래 순진한 조선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했습니다. 조선 백성들이 생산한 농산물과 다양한 자원들을 싼값으로 갈취했습니다. 더불어 살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조선 백성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돌들로 자신들의 빵만을 만드는 일에 전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의 주권을 강탈했습니다.
처음에는 외교권을 박탈했고, 다음에는 조선 백성들 위에 주인처럼 군림해서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그들은 조선으로 멈추지 않고, 만주로, 중국으로, 러시아로 그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던 ‘황국신민화’다 ‘아시아의 평화’다 하는 것들은 말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조선과 주변 국가들을 대상으로 세상의 모든 권세와 모든 영광을 자기들만 누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절대자 하나님의 자리에다 천황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통해서 천황을 하나님처럼 예배할 것을 제도화했습니다. 그들은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천황의 이름으로 죽음도 불사하는 신민이 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하나님 놀이를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고통당하던 우리 선조와 겨레는 3.1독립선언서를 통해서 고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폭력적인 제국주의의 삶을 거부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삶을 꿈 꾸었던 것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어디를 보아도 우리 겨레가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저 독립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비록 우리 겨레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고통 가운데 살고 있지만,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에만 집중하겠다고 했습니다. 남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에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하늘의 권리, 자유와 평등을 누리기 위해서 힘을 결집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목표야말로 삶의 궁극적인 목적, 인간 존재의 의미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1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아래 있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압도하고 역전해서 우리 겨레만 권세와 영광을 누리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고,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인해서 화해하기 어려운 원한을 자아냈지만, 그 잘못을 과감하게 바로잡고, 서로 이해하며 공감하며 사이좋게 사는 새 세상을 열자고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무도한 침략과 억압에는 항거하지만, 일본 국민을 증오하거나 적대하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울분과 원한에 사무쳐 사는 것이 동양 전체를 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책임을 다하자고 했고, 이를 통해서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에 발판을 마련하자고 했습니다. 이러한 목표야말로 제국주의의 권세와 영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1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에 목표를 두지 않았습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사해동포주의 가운데 살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사해동포주의는 하나님이 특정 민족에게 독점되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는 인종과 민족, 국적을 초월하는 덕목입니다. 그래서 정의, 인도, 생존, 존영, 자유, 평등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상대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을 공약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민족적 생명을 보전하고, 우리의 문화를 발전시키며, 우리의 인격을 완성하고, 우리의 행복을 도모하며, 우리 자손에게 영광스러운 유산을 남기자고 했을 뿐 아니라,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에도 동일하게 공헌하자고 했습니다. 이러한 목표야말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아래서 서로를 섬기며 평화롭게 더불어 살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오늘 대한민국의 희망찬 역사를 향한 길
이렇게 3.1운동의 대장정을 연 3.1독립선언서는 예수께서 이겨내신 세 가지 시험을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재현하고자 한 위대한 출발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시대의 격변기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지만, 3.1독립선언서에 반영된 우리 선열들의 정신을 잘 계승함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희망찬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자기 국가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시대정신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그 흐름을 역류해서 서로 존중하며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는 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믿는 동맹국 미국을 보십시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표어 아래 백인 중산층의 지지를 받아 미국의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최근 인접 국가인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해서, 적성 국가로 분류하는 중국에 대해서, 그리고 매우 친밀한 관계라 여겨온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 높은 관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전문가들조차도 그러한 결정이 미국을 결국에는 어렵게 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그러나 트럼프와 그 측근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기대하면서 세계질서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높은 관세 장벽에 서게 된 국가들이 그대로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그들도 미국에 대해서 저항하는 노력을 할 것이고, 오래지 않아서 서로 물고 뜯기다가 큰 상처만 서로에게 남길 것이 분명합니다.
미국은 우리 대한민국이 한미 동맹관계에 있다고 해서 예외로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멕시코나 중국에 있는 우리의 기업들은 미국의 높은 관세를 피하기 위해서 고민하지만,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곧 국내 기업들에 대해서도 높은 관세가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국민 전체가 어려움에 직면할 것입니다. 한편,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1기에서처럼 주한미군의 주둔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에 대해서 주둔비용의 증액을 요구할 것입니다. 증액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압박할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 이야기만 나오면 경악하는 우리 국민은 큰 위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전략에 의하면, 주한미군은 중국과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군대이지, 북한에 대해서 우리 한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 주둔하는 군대가 아닙니다. 상주에 배치된 싸드 (THADD)라는 무기 역시 북한의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차라리 미군을 철수하라 한다든지, 오히려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평택기지의 사용료를 요구한다든지 하는 강수를 두는 주체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 자체를 겸허하게 돌아보십시다. 한국전쟁 전후한 시기에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국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봄이면 보릿고개로 인해서 기아를 걱정해야 했고,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이승만 민간독재 정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에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기적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최근 검찰독재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것 또한 잘 극복해 낼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력 13위의 국가이고, 세계 군사력 6위의 국가입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대한민국의 문화를 지칭하는 한류가 넘실대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세계의 젊은이들은 우리 한류에 열광하면서 우리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두 번의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서구의 민주주의 선진국들조차 우리 대한민국의 성숙한 민주주의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폭력과 약탈이 난무하는 다른 나라들의 시위와 달리 우리 대한민국의 시위는 현장에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으며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에 허락하신 은총이자 분에 넘치는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우리 선열들이 3.1독립선언서에서 보여준 것처럼, 우리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가 동북아의 평화로, 동북아의 평화가 세계의 평화가 되기를 소원하는 평화국가로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의 노하우를 배우고자 할 때, 아낌없이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코리안드림을 안고서 우리를 찾아올 때, 두 팔을 벌려 환대하며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재미교포가 한국을 방문하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국에 와보니 웬만한 동네는 모두 고층 아파트로 되어 있다. 가정집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중 화장실에도 미국에서는 부자들만 쓰는 비데가 설치되었고, 주차 티켓을 뽑는 그런 촌스런 행동은 하지 않고 우아하게 자동 인식으로 주차장에 들어간다. 모든 대중교통은 카드 하나로 해결되고, 집에 앉아서 햄버거를 배달시켜 먹고, 어느 집을 가도 요즘은 비밀번호나 카드 하나로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간다. ...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에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토로한다. 전세값이 얼마나 비싼지, 정치는 얼마나 헛짓을 하는지, 아이들 교육시키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지옥에 살고 있다고 모두들 아우성이다. ... 국토는 온통 푸르고, 넓게 거미줄같이 뻗은 고속도로, 다목적댐과 물은 항상 넘실댄다. 홍수와 가뭄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더 기가 막힌 사연이 있다. 한민족은 5천 년을 배고프게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쌀이 넘쳐나 저장할 창고가 없다. 그뿐이랴. 각종 먹거리가 산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비만이 늘어나고 당뇨와 혈압 환자가 줄을 잇는다. 세상은 이렇게 풍요로운 데, 왜 우리는 바쁘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가? 더 많이 소유하고 싶고, 남보다 더 앞서고 싶은 욕구를 이루지 못한 불만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좋은 집, 좋은 교통, 좋은 의료제도 안에서 불안한 삶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부탁드린다.” 이 재미교포는 미국에서 부자로 살고 있는 자기보다 더 풍요롭게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왜 지옥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힘들어 하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고 여겨집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겨야 할 시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과 넘치는 복을 받은 우리는 예수께서 세 가지 시험을 잘 이겨내신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시험에 직면할 때마다, 당당하게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많이 가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불평불만에 빠지기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자족하면서 감사하며 사십시다. 경쟁에 이겨서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며 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보다 열악한 삶에 처한 사회적인 약자들을 기꺼이 섬기면서 사랑으로 살고자 애씁시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면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 잘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청지기로서 살아가십시다.
우리는 누가복음 본문의 마지막 구절 4장 13절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마는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잠시 동안 예수에게서 떠나갔다.”라는 구절입니다. 악마가 잠시 떠나갔다는 것은 아주 떠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겁날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철저히 추구한다면, 어떤 시험이라도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개인의 차원에서든, 가정의 차원에서든,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차원에서든 끊임없이 다가오는 세 가지 시험을 넉넉히 이겨내고, 세상에 희망을 주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십자가를 향해서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정종훈 목사 (연세대학교 교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3.1운동 106주년 주일을 기념하며,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3.1독립선언서를 통해 세 가지 시험을 이기고자 애쓴 우리 선열들의 꿈을 돌아봅니다. 오늘 우리는 당신의 엄청난 은총과 분에 넘치는 사랑 가운데서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시험에 더 이상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평화롭게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나라가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서, 인권과 정의가 넘실대는 국가로서 세상 모든 국가의 이정표가 되도록 헌신하게 하소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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