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 고운기 -
6학년에 올라간 형과 누이들은 소고를 배웠다
가을 운동회 때
그들이 벌이는 소고춤이 이 날의 절정이었다.
운동장에는 만국기처럼
소고의 선배들이 분야별로 도열해 있었다.
형과 누이들의 반은 농사꾼이 되었고
반의 반은 서울이나 광주나 부산으로 돌 벌러 갔고
나머지 반의 반 가운데 반씩은 조폭의 예비단원이 되거나
아주 운 좋은 중학교 진학반이 되었다.
행렬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소고를 칠 줄 알아야
가장 안정된 한 촌락의 구성원에 들어갔다.
그러기 싫다면 슬금슬금 눈치 보며 뒤따르다 끝내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기차를 탔다. 도시의 불빛에 떠는 부나방처럼, 황량히 살아남자고 온갖 깃을 친 흔적들, 그런데도 해가 갈수록 뒤따르는 형과 누이들이 늘어만 갔다.
소고는 찢어 없애야 했다.
산화한 흔적은 애처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운동회가 파하고
저무는 가을 햇빛을 안고 걸어가는 형과 누이들의 손에 들려 있던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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