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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 몇 그루 - 박노해 - 빈 밭둑에 서 있는 뽕나무 몇 그루 올 여름도 변함없이 잎새 푸르다..

ree610 2024. 7. 6. 07:53

뽕나무 몇 그루

박노해

빈 밭둑에 서 있는 뽕나무 몇 그루
올 여름도 변함없이 잎새 푸르다

많이 겪고 오랜 견딘 굽은 등지에
올해는 올해의 뽕잎을 가득 피워내도
아름 따줄 손길도 누에도 없는 세상

단물 그득 차오른 검붉은 오디 열매도
두 손과 입술 물들으며 달게 먹어줄
이쁜 사람 하나 없는 휑 빈 밭둑에

한낮의 정적을 깨우는
뻐꾸기 소리도 맥이 없다

세상이 더 빨라지면 이젠
뽕잎도 오디도 추억마저 사라지겠지

쨍쨍이던 하늘에 뭉클뭉클 먹구름 일더니
후두둑후두둑 소박비 쏟아진다

빈 밭둑에 나이 든 뽕나무 몇 그루
푸른 옷소매 저어 오리 열매 감싸느라
괜히 저 혼자서 바쁜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