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법

정성진 장관(법무부) 별세

ree610 2024. 4. 13. 17:53

 

[정암 정성진 선생님 별세]

언론에서는 '전 장관' '전 총장' '전 교수'로 쓰였지만, 저로서는 다중의 인연을 갖고 있기에, 정암 선생님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별세 소식을 갑작스레 들으면서, 다중의 인연을 떠올리게 됩니다.

1. 처음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정암 선생이 <대검찰청 총무부장>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훤한 외모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확하고 깐깐한 검사로서의 느낌...면도날 검사라 할까요.

2. 그가 가장 유명해졌던 것은 1993년, 김영삼 정부 하에 <대검 중수부장>일 때였습니다. YS의 초기 1년간은 가히 혁명적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때 하나회 숙정 말고도,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등 쾌도난마 개혁을 단행할 때입니다. 공직자재산공개시, 검사 중에서 재산이 가장 많았습니다. '중수부장'은 부패,금융,특별범죄를 잡는 무서운 호랑이 같은 이미지인데, 하필 재산이 제일 많은 공직자가 중수부장이라...그 재산형성의 근거와 비리 관련성에 대한 아무 연관성 없이 그냥 여론의 몰매를 맞고, 검사직을 사퇴해야 했습니다. 그땐 그런 시기였습니다.

3.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통상 사퇴시, 억울한 감정을 여론에 쏟고, 반정부인사가 되거나, 아니면 변호사로 개업하면 (전관예우  관행이 보편화되어 있던 그 시기에) 큰 돈을 벌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언가 동정여론이 사건을 몰아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변호사 개업도 않았습니다.  그는 공직을 내려놓고, 미국 대학의 연구원으로 가서, 조용히 공부했습니다. 회고록도, 대담도 일체 않았습니다.

4. 다음해 귀국한 그는 학자로서의 길을 추구했습니다. 국민대 교수로서, 성실히 논문을 썼고, 후배 법학자들과 소탈.겸손한 자세로 어울렸습니다. 어깨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만큼 바뀌었습니다. 논문도 논문답게 쓰면서, 거기에 실무감각을 곁들이니, 필요한 논문이었고 좋았습니다. 후학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학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대학에서, 학장, 그리고 총장을 역임했는데, 자리를 열심히 추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자신의 대학을 위해 이런 분이 학,총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기에 끌어올려진 것입니다.

5. 언젠가 물어본 적 있습니다. 총장 하면 학생,교수,대외 요구에 힘들텐데, 어떻게 잘 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요. 그는 "부지런히 들었다, 잘 들어주니, 문제의 반은 풀리더라"고 웃으며 답했습니다. 지도자의 일차적 덕목은 미사여구 잘 구사하는게 아니라, 경청과 존중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6. 학계의 어려운 사정도 잘 알아, 나름 기여하기 위해 형사법학회에 거액의 학술상 기금을 냈습니다. 학회는 "정암 형사법연구상"을 제정했고, 그 1회 수상자가 조국 교수였습니다. 이어 여러 학자들이 연구상을 수상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러 기관, 단체에 기부를 계속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변호사 개업을 않았던 것 같습니다.

7. 노무현 참여정부때 그는 두차례 공직을 했습니다. 처음엔 신설된 "청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11년전 "청렴" 관련으로 타의 사직을 했는데, 그에게 돌아온 정부의 관직은 "청렴위원회"니 개인적으로 충분히 신원이 된 셈이랄까요. 그 뒤 참여정부 마지막 법무장관직을 맡았습니다. 당시 잔여임기가 4개월 정도 뿐이라, 누구도 맡지 않으려는 자리였고, 선임자가 후배였기에 사양했지만, 끝내 수락했습니다.

8. 그 시기동안은 로스쿨 인가절차 시기였고, 그는 법무장관으로서  뒷받침을 했습니다.  그 즈음에 1981년 사법시험 3차 면접 탈락자(총10인)의 탈락사유가 권위주의정권의 탄압에 의한 것이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정이 있었습니다. 그 후속순서는 정부 차원에서 수용, 원상회복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어느 행정부처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억울하면 재판을 통해 바로잡아라는 오불관언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정장관은 법무부에서 선제적으로 조사, 원상회복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이를 바로잡았습니다. 2008년 1월 초에, 장관은 3차합격처분을 내리고, 특별히 법무부회의실에서 합격증교부식까지 열어주셨습니다. 필자도 그 일원입니다.  그때 오고간 훈훈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요. 아마 그가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타의에 의한 공직 사퇴의 아픔을 통해 타인의 억울함에까지 충분히 공감력을 가질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9. 검찰총장 후보추천위원회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정암 선생은 두차례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2013년때는 대통령이 미는 인사는 김학의라는 소문이 많았습니다만, 김학의는 추천과정에서 탈락했습니다. 아마도 종합적 세평과, 법조내의 인사평을 두루 반영한 것이겠지요. 2017년에는 문무일 총장이 될 때였는데, 그때는 저도 추천위 멤버였습니다. 정위원장은 여러 의견을 잘 조율하여, 대체로 적임자군을 잘추려내었고, 참 회의진행을 원만하고 솜씨있게 하시는구나 인상을 받았습니다.

10. 마지막 공직은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인것 같습니다. 이 자리 역시 형사법과 형사실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더하여, 인간적. 종합적 안목과 균형감각이 필요한 것인데, 아마도 정암 선생만큼 적임자도 잘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11. 부고기사를 보니 "법조선비"라는 별칭이 있는 모양입니다. 선비다운 꽂꽂함도 있지만 그 꽂꽂함을 부드러움 속에서 융화시켰기고,  경륜과 균형도 있어 법조신사라 부르는게 더 적합할 듯도 싶습니다.

12. 정암 선생의 경우, 긴 인생이 1993년 전/후로 나누어질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뜻하지 않은 재난이 자신을 나락으로 빠트릴때, 인간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누구나에게 쉽지 않습니다만, 그런 대처과정을 통해 인간적 진면모가 드러납니다. 그는 쉽게 분풀이성 반박.해명.대응을  하지 않았고, 침묵과 인내의 연단과정을 거쳤습니다. 이후에도 어떤 해명도 않았지만, 아는 이들은 알았고 점차 그의 선업에 대한 평판이  조용히 쌓였고, 이후의 공직세계는 그러한 평판을 필요로 한 곳에서 가져다 쓴 것입니다. 큰 자리, 공직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는 필요한, 공적 역할을 잘 수행했습니다. 전혀 무리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13. 정암 선생은 기질적으로 보수였겠지만, 거기에 묶이지 않고 유연하고 따뜻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법률가세계에서 두루 신망받고 존경받는 드문 분이었습니다. 사태의 흐름을 보는 눈에 더하여, 세상사 인간사의 흐름에 대한 혜안을 갖고 계셨기에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정암 선생님의 살아온 세계에 대해, 한번 긴 인터뷰로 정리하고 싶었지만, 공직자로서는 그런 게 아니라며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궁금함 많은 대목은, 저로서도 채울  길이 없습니다. 좋은 어른의 옆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ㅡ  한인섭 교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