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본문 : 롬 1:16~17
찬송 : 542장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을 삶으로 나타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복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종교인일 뿐 그 삶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 때문이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구원은 여호와로부터이다.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 구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이자 사랑이고,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 능력으로,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환난, 궁핍, 질병, 곤란, 죄와 사망 가운데 하나님은 동참하시며, 지체하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신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았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긴 이유는 바로 인류를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했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 있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사시는 것, 영생을 얻는 것,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며 믿음에 믿음을 더할 때 믿음은 더 성숙한 믿음을 가져온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온 인류에 임하신다. 창조주 하나님, 인간을 능히 굴복시키시며, 멸하시며,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은 능히 그의 약속을 지키시며, 우리를 능히 견고케 하신다. 능히 은혜를 공급하시며, 우리의 간구를 능히 넘치게 하시고, 우리의 의탁한 것을 능히 지키신다.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인간들을 능히 살리신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도록 능히 보호하시고, 고치시며, 능히 만물을 복종하게 하시고,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수 있으며,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히 시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는 능히 시험을 감당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주님으로부터 능력의 삶 살게 되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영혼을 주님은 기뻐하신다.
오늘의 기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구원의 감사와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자녀에게 물려줄 우물
본문 : 창 26:12~18
찬송 : 543장
하나님이 그랄 왕을 통해 이삭 부부가 공개적으로 안전을 보장받게 하셨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다. 여전히 가뭄은 극심하다. 가뭄이 든 땅에서 살아낼 수 있는 방법, 그건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고 이 땅에서 계속 살면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성실하게 일을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삭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농사를 짓는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보통 때처럼 밀 보리를 심고, 양떼를 먹일 풀을 얻으려고 목초지를 가꾼다.
물은 어떻게 하나? 감사하게도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삭은 아버지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뿌릴 수 있었다. 아버지가 팠던 우물 때문에 아들이 살 줄 누가 알았을까? 아버지의 우물이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 것이다.
자녀들이 인생의 극심한 흉년과 맞닥뜨릴 때 그 자녀를 일으킬 신앙의 우물을 파두었는가? 자녀들이 '우리 아버지는 이런 때 믿음으로 예배했는데. 우리 어머니는 이런 때 간절히 기도했는데!'라고 기억하면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부모가 파놓은 기도의 우물, 말씀의 우물, 예배의 우물, 그 신앙의 우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녀를 살리는 생수가 된다. 자녀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힘들 때 누군가를 보며 힘을 얻은 적이 없는가? 목마를 때 생수가 되어준 누군가가 없었는가?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면 목마른 누군가의 우물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려울 때 더욱 기도하고, 더욱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 기억하면서, 그도 역시 기도하고 예배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인생의 가뭄을 이겨낸다면 얼마나 감사한가? 부모가 먼저 파놓은 우물이 있으면 그걸 다시 파는 건 훨씬 수월하다. 실제로, 이삭이 복을 받으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해서 쫓아낸다. 결국 이삭이 골짜기로 옮겼는데, 그곳에도 아버지가 파놓은 우물이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들을 메워놓긴 했지만 이삭은 그 우물을 다시 판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지금 우리가 기도의 우물, 말씀의 우물, 예배의 우물, 봉사의 우물, 헌금의 우물, 믿음의 우물 등 많은 우물을 파놓아야 한다. 그러면 자녀가 인생의 큰 흉년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그 우물을 기억해 낼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파놓은 신앙의 우물로 찾아와서 넉넉히 흉년을 이길 생수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파놓은 우물들이 자녀 인생에 희망의 씨앗이다.
오늘의 기도
인생의 고비마다 신앙의 우물을 파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인생의 가뭄과 맞닥뜨릴 때 우리가 판 신앙의 우물들로 찾아오게 해주소서. 그곳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길 생수를 얻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토기장이 하나님
본문 : 렘 18:1~10
찬송 : 94장
성경은 일상 속 평범한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진리를 전한다. 예수님은 고기 잡는 어부들에게 "앞으로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소금과 등불을 가지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고 가르쳐 주셨다. 바람에 날리는 겨를 보시고 "악한 사람이 마지막의 모습이 저와 같다"고 가르쳐 주셨다. 본문 말씀은 고대 원시사회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것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 이스라엘의 관계를 가르쳐 주신다. 토기장이 하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해 보자.
첫째, 우리 인생은 토기장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진흙이다. 우리 인생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에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다. 사람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지만, 아무리 지식이 많다고 하지만, 아무리 권세가 많다고 하지만 자기 스스로 이 세상에 온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다. 인생의 궁극적 운명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다.
둘째, 토기장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과 목적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다양한 그릇들을 만드신다. 인생을 지으실 때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일정한 계획에 따라 지으신다. 또한 그들에게 부여되는 은사도 각각 다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사를 맡겼든지 그 가운데 최선을 다하면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에게 받을 상급이 있다.
셋째, 토기장이 하나님은 마지막 기회를 주신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드는데 때로는 그릇이 터지기도 한다. 진흙 속에 섞이지 않아야 할 것이 섞였기 때문이다. 돌이나 나무조각 같은 것이 섞이면 그릇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으려 할 때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을 거역하면 우리는 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토기장이 하나님은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다시 진흙을 뭉쳐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어 가신다. 우리가 끝까지 반항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죄를 지으면 마지막에는 내어 버려질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 죄가 비록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여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인생은 토기장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진흙이다. 나를 향하신 토기장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깨달아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자. 그리고 실패한 자리, 불순종의 자리에 서 있다면 돌이켜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겸손함으로 나아가자.
오늘의 기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목적하심을 가르쳐 주시고 나의 고집을 내려놓고 오직 나를 만드신 하나님만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오벧에돔처럼
본문 : 대상 26:4~8
찬송 : 449장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명으로 산다. 오벧에돔이 바로 그런 소명을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그 소명 속에서 행복을 누린다. 오늘 말씀은 오벧에돔이 복 받은 자라고 기록한다. 무슨 복을 받았다는 것인가? 26장에 기록된 이름들은 성전 문지기로 부름 받아 사역한 사람들이다. 성전 문지기는 말 그대로 성전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문지기 하면 하잘것없는 사람이 하는 일로 여길 수 있다. 종처럼 문이나 지키는 일이니 누가 그들을 복 받을 자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성전문지기가 된 것을 하나님 앞에서 영광으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키게 하셨다는 것이다. 문지기의 역할은 어떻게 보면 대단한 능력이나 재능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을 내가 목숨 걸고 지키고 있다는 그 자부심은 어떤 사람들보다 컸다.
우리도 성전 문지기로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교회 안에 불평의 소리가 들어오지 않도록 성전문지기로 살아야 한다. 악한 영이 주님의 교회에 틈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원망과 비방과 불신과 불순종의 씨앗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이렇게 성전 문지기로 부름 받은 자들 중에는 오벧에돔의 자손이 60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5절 말씀처럼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였다. 오벧에돔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복을 받았나?
오벧에돔은 용기와 믿음이 남달랐다. 그는 순종과 결단의 사람이었다. 다윗 왕이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방치 되어있던 법궤를 그의 성으로 옮기면서 하나님의 명령과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하지 못하다가 수레를 끄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순간적으로 법궤를 붙들면서 "성물을 만지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명을 어기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죽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법궤는 다윗 성이 아닌 오벧에돔의 집으로 모셔가서 석 달 동안 있게 된다. 오벧에돔은 그런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법궤를 기꺼이 모시는 믿음의 결단을 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며 그 말씀대로만 순종하고 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오벧에돔은 이 결단으로 축복의 반열에 들어갔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줄 알고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쓸 준비를 해야 한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하자. 언젠가 해야 한다면 지금 하자. 반드시 해야 한다면 믿음으로 하자. 미련하고 저주처럼 보였던 그의 결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매일 물질과 신앙, 사람과 생명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생각하고 계산하다가 결단을 미루거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산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결단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그 결심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오벧에돔과 같이 믿음으로 행하고, 용기 있게 행하고, 순종함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지금 사랑하라!
본문 : 요 21:20~23
찬송 : 305장
오늘 하루는 선물로 주어진 하루이다. 이 하루를 선물로 받게 되면, 다시 새롭게 살아가야 할 근거, 힘이 생긴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잘 보내야지'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잘 받아야지'가 맞다. 우리가 하루를 받는다는 것은 주님 만날 날이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곧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로 오고 있기에 사랑이 더 가까이 왔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간다고 한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아직 이 세상이 좋고, 이 세상에 미련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너무 행복한데, 이 행복이 시간과 함께 빨리 지나가니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반대로 세월이 참 안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의 무거운 짐, 삶의 괴로운 짐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이런 고통을 겪다보니 이 짐, 이 고통, 이 불행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못 벗어나다보니 시간이 안 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굉장히 느리게 가는 이 하루를 어떻게 빨리 보낼 수 있을까? 바로 오늘,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가장 먼 거리를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다. 아무리 먼 거리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주님께 "주님,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묻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요한을 살려두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베드로야! 요한이 어떻게 살든지 얼마나 살든지, 그건 네가 신경 쓰고 관심 가질 바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네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 오늘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땅에서만 사랑하지 천국가면 사랑할 수가 없다. 천국에 가면 미운 사람도 없고, 사랑하고 용서해야할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육신에서 벗어나고, 죄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주님, 사랑이신 주님과 더불어 사랑의 교제로 충만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만 사랑하고, 용서하며, 위로하고 격려한다. 한 사람 제대로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그래도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점점 사랑으로 살아갈 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오늘 사랑해야 할 사람도, 사랑할 시간도, 사랑할 기회도, 사랑으로 살 삶도 점점 줄어든다. 사랑으로 살아갈 날도 부족한데, 뒤에서 험담하고 욕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선물로 주어진 하루,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아, 오늘 지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하루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원초적 사랑
본문 : 요일 4:7~11
찬송 : 304장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십자가, 부활, 하나님의 율법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있는데 그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다. "그 수많은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며 큰 계명이라고 대답해 주셨다.
성경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결국은 사랑부터 시작해 사랑이라는 것에 맺어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숱한 정의가 있지만 짧은 구절로 표현한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인생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범죄한 인생은 죽어야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시요, 창시자이시다. 사랑의 근본이시다. 사랑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요, 하나님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선수적인 사랑이다. 즉 '먼저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목적은 구원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으니, 여기에 하나님의 확실하고 영원하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바로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으니,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사랑보다 숭고한 사랑의 극치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요한은 이 사실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밝히 증거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계셨다. 그것이 원초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었다. 시작도 맺음도 모두 사랑이다. 그 사랑이 만물을 지으셨고, 인간을 사랑하셨으며,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내어주신 사랑의 가시적 현현이다. 그것이 성탄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아직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확증, 완성하셨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그 사랑을 누리고 또 마땅히 나누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낮고 천한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신 현현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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