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살며, 사랑하며 사는
본문 : 요 21:15~19
찬송 : 435장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이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셨을까?
주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거듭해서 지었던 죄를 회복시키기 전에 새로운 믿음의 고백을 이끌어 내시고자 하셨다. "네가 나를 믿느냐? 베드로 회개했느냐? 나를 고백할 준비가 되었느냐? 이제 나에게 순종하겠느냐"라고 물으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저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물음은 베드로에게도 오늘 나에게도 가장 날카롭고 의미심장한 물음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단순히 세례받은 남자나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주일이면 형식적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주중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신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고 신뢰하고 순종한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며 산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을 기억하며 그분을 사랑한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 예수님이 나를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속박에서 풀어주신 것을 확신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믿음으로 사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듣기를 좋아하고, 그의 방식과 말과 행동과 계획을 말하며 귀를 쫑긋 세운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듣기를 좋아하는가? 예수님을 매일 매시간 생각하는 즐거움이 있는가?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써 놓은 글 읽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말씀을 읽는 것이 즐거운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성경을 읽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셋째,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가?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을 버리고, 기뻐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엄격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처럼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 넷째,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과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가? 다섯째,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가? 날마다 그리스도께 드릴 말씀이 있기에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하자. 여섯째, 사랑하는 사람과 항상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가?
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가? 사랑하며 사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오늘도 주님은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
오늘의 기도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재학 목사
광명교회
화-거룩한 기다림
본문 : 막 5:25~43
찬송 : 399장
살다 보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 듯 한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의 기간에 하나님은 더 큰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죽어가는 딸을 살려 달라 애원한다. 그런데 주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속히 발걸음을 옮기실 때, 한 여인이 나타난다. 혈루증을 앓으면서 병을 고치기 위해 평생을 애썼지만 소용없었던 여인이었다. 낫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진 몸으로 소망 없는 하루하루를 살다가 실낱같은 소망의 빛을 보았다. 예수라는 분이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었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병들고 약한 몸을 이끌고 예수께로 다가갔다. 간신히 주님께로 다가간 그녀는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혈루증이 깨끗이 낫게 된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이 여인을 주님은 처음부터 한없이 깊고 넓은 사랑과 관심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소외받고 병든 여인을 향해 누구도 갖지 못한 연민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다가가셨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시면서 주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하신다. 이 물음은 옷자락이라도 만지고야 말겠다는 믿음의 주인공을 찾으시기 위한 주님의 따뜻한 음성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혈루증 여인처럼 나를 외면하더라도 주님만은 내 모든 필요를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아시고 나를 위해 바삐 가시던 걸음마저 멈추시는 분이시다. 이때 야이로의 집에서 종이 와서 야이로의 딸이 죽어버렸다고 말한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금방 죽을 것 같지는 않았던 그 여인에게 시간만 낭비하지 않았더라면 내 딸이 죽기 전에 가서 고쳐주실 수 있었으리라고 원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놀랍고, 위엄 있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 말씀이 야이로에게 큰 믿음과 용기를 갖게 했다. 그것은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믿음이었다. 결국 예수께서는 야이로의 집에 가셔서 이미 죽어버린 소녀를 살려내신다. 야이로는 기다림 속에 부활의 은총을 맛본 자였다. 믿음이란 기다림임을 알았다. 주님의 더 큰 뜻을 깨달아 알고자 침묵했다. 야이로는 주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은 내게도 하신 말씀이었음을 깨닫는다.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기의 순간으로 몰아가신다.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해답은 침묵의 믿음이요, 기다림의 믿음이다. 일상적인 기다림, 목적 없는 기다림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웃에 그 뜻을 펴기 위한 거룩한 기다림이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겸손히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우리의 몫이 되게 하자.
오늘의 기도
위기를 당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겸손히 기다리며, 말하기 보다는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의 눈과 귀를 주님께만 열어놓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태윤 목사
번암교회
수-예수님은 평강의 왕
본문 : 사 9:1~7
찬송 : 410장
크고 작은 전쟁을 수없이 치르며 인류의 역사는 이어져왔으며, 지금도 그 참화는 그치지 않고 있다. 이 시대에 세계 수많은 민족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일까? 군사 강대국? 경제 대국? 아마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평화일 것이다.
인류가 일정한 구역을 정하여 서로 나뉘어져 살기 시작한 이후, 지상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언하건데 평화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전쟁과 테러의 위협과 공포 속에 있는 시대는 진정한 평화가 간절하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아기 예수가 탄생하기 800년 전에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아기에 대한 이름들 중에 하나가 '평강의 왕'이라고 말한다. 이는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 세상을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믿음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평강의 왕 메시야를 기다렸고, 대강절은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예수님은 모든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다. 그리고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단번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죄인된 우리의 사이에 화평을 심으셨으며, 우리로 이 세상 사람들과 화목케 하시고,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의 길을 열도록 하셨다.
오늘날의 시대는 실망과 절망과 염려 걱정, 두려움과 불안들이 우리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이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해법은 이 땅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위로부터 오신 예수그리스도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 주님이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대강절 절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의 평화가 이 땅, 이 민족위에, 온 세상, 온 누리에 두루두루 임하시고 충만히 덮으시길 소원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안에 계신 주님은 평강의 왕이시다. 화평의 제물이 되셨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평화와 영생을 향한 소망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놀라운 그리스도의 평강, 변하지 않는 평강, 빼앗기지 않는 평강,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으로 우리들은 늘 불안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고 평강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모시고 그 평안가운데 거하게 하소서.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강절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형흠 목사
은석교회
목-복된 가문
본문 : 막 10:13~16
찬송 : 435장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기 아이들을 만져주시기를 바라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그런데 제자들이 꾸짖는다. "왜 성가시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냐!."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뜸 화를 내면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내가 만져주기를 바라고 데리고 오는 어린 아이들을 막지 말라. 아이들에게 내 손길이 필요하다. 내가 만져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져주심, 하나님의 손길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면 만져주고 싶고, 만져주면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아,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사랑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보는 것조차 싫고, 피하고 싶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만지면 짜증이 난다. 기분이 나쁘고 불쾌하다. 하지만 사랑하면 하나가 되고 싶어진다.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만지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만지면, 이것은 구원이다. 사랑을 더 확인하고,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손길이 많이 닿아야 한다. 하나님의 손길이 많이 닿는 만큼 신앙과 삶은 위대해진다. 하나님의 손길이 많이 닿고, 손길이 많이 간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명력이 왕성해진다.
부모가 자녀의 손을 잡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같이 경험하고, 그리고 내 자녀가 또 손주의 손을 잡고 함께 교회로 와서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같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의 유산은 어떤 신앙이든지 다 물려줘야 한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신앙, 하나님의 사랑은 남김없이 다 물려줘야 한다. 주일성수할 때, 새벽기도 시간에, 금요기도 시간에, 전도할 때, 봉사할 때, 십일조 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내게 닿았다. 이런 신앙의 유산을 빠뜨리지 말고 다 물려줘야 한다. 물려받은 모든 신앙의 유산에다가, 내게 닿은 하나님의 손길, 신앙이 더해지고 보태져야 한다. 그 신앙을 자녀들에게 남김없이 물려줘야 한다. 내 부모보다 내가, 나보다 내 자녀의 신앙이 점점 더 좋아져야 한다. 그래야 다윗의 집안처럼 점점 강해져 가고, 위대한 가문을 만들 수 있다.
내 자녀가 자녀를 위해 기도하기를 '내가 비는 축복이 내 아버지가 내게 빈 축복보다 더 낫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더 많다'라고 기도한다면, 믿음의 유산을 제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축복기도를 받는 자녀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건,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하다. 이런 위대한 믿음의 가문을 만들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만져주심으로 남겨진 우리 신앙의 유산들이 대대로 잘 이어져서 위대한 믿음의 가문을 만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장덕 목사
도원교회
금-사랑과 신뢰
본문 : 벧전 1:22
찬송 : 310장
가정이 가장 필요로 하는 열매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일 것이다. 이 땅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모두 사라진다면 결국 내다볼 수 있는 미래는 멸망밖에 없듯이, 그만큼 우리 가정에서도 모든 일에 있어 해결책이자, 든든한 매듭이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사랑과 신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깨끗한 영혼으로 거짓이 없이 마음 뜨겁게 사랑하며 신뢰하고 있을까?
첫째는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고,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단어인 '사랑'에 대한 명쾌하고 정확한 해답이 쓰여 있다. 사랑하기 이전에 우리는 반드시 사랑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시작해야 그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아름답지 못한 매듭을 짓고 있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직면한 문제들 앞에 어떻게 해답을 찾아야할까? 그 해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것들로부터 찾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행하신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완벽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사실 이미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악한 우리로 인해 당면하셨던 모든 문제들과 아주 닮아있다. 이런 문제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행하셨던 그 길이 바로 사랑의 길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런 선택을 낳았던 하나님의 그 마음을 배우고 지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있을 때 모든 문제는 그 의의 열매들로 인하여 가장 아름답게 해결되어질 것이다. 바로 이 모든 과정이 '사랑'이고 '하나님'인 것이다.
둘째는 신뢰 없는 사랑 없고, 사랑 없는 신뢰가 없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순종에 있어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신뢰 즉 믿음이다. '믿음이 없는 순종'은 순종이 아니라, 강압에 의한 굴복이나 다름없다. 신뢰를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다. 이렇게 사랑과 신뢰는 아주 밀접한 관계이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표현이 굳센 마음과 함께 일치가 될 때 상대방 또한 그 믿음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신뢰하기 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불신은 사람에 대한 불신을 낳고 그 불신은 관계를 깨버리기 일쑤이다. 사랑하면서 신뢰하지 않는 일, 신뢰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일은 둘 중에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둘 모두가 결여된 것이다. 이토록 가정에서도 사랑과 함께 신뢰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과 신뢰는 모두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작은 용기는 큰 용기를 불러 일으켜서 작은 신뢰를 큰 신뢰로, 작은 사랑을 큰 사랑으로 변화시켜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신뢰로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도록 용기를 주셔서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경희 목사
밀알교회
토-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본문 : 창 26:1~11
찬송 : 301장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한 후 수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게다가 큰 흉년까지 닥쳤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정의 어려움이 겹친 것이다. 흉년을 피해 그랄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가보니 그곳도 마찬가지여서 다시 이집트까지 피난 갈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남편 이삭에게 나타나서 명령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지시한 이 땅에서 살아라."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사람들에게 누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리브가의 미모 때문에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기 위해 남편인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브가가 그런 남편의 행동에 얼마나 실망했을까? 흉년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생활도 힘든데, 낯선 땅에 와서 부부 사이인 걸 들키지 않으려고 어색한 행동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랄 왕이 우연히 이삭과 리브가가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비멜렉은 두 사람이 부부관계라는 것을 알고선 백성들에게 경고까지 한다. "이 남자와 그 아내를 건드리는 사람은 사형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멋진 분이신가. 그랄 왕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이삭과 리브가의 안전을 보장해주신다. 왕의 선포 후에 리브가가 비로소 자유롭게 외출하면서, 얼마나 감격했을까?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돌보시는구나! 나와 남편을 이토록 안전하게 지켜주시는구나!' 그동안 남편에게 받은 모든 상처와 불만, 그리고 불안감이 한꺼번에 눈 녹듯이 사라지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리브가를 돌보실까? 그녀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들도 우리처럼 연약하고 두렵다.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그 모든 사건과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이유 한 가지 때문에 하나님이 이들을 돌보셨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것으로 삼으셨다. 아버지의 자녀로 삼으셨다. 우리의 가슴에서 예수님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눈에 우리가 얼마나 귀하겠는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 자기 자녀인 우리를 눈동자처럼 돌보신다. 환난과 풍파가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 믿음 굳게 붙들고, 마침내 승리하게 하시는 주님을 간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저희를 자녀 삼으시고 눈동자처럼 돌보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신 주님을 더욱 굳게 붙들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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