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죽음에 이르는 지식?

ree610 2021. 5. 17. 08:43

죽음에 이르는 지식?

‘할아버지, 오늘 제 마음이 슬퍼요. 제 짝꿍이 학교에 안 와서요.’
‘왜 안 왔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못 왔데요.’
‘그렇구나...’
‘할아버지, 그런데 제가 정말 슬픈 것은 할아버지도 언젠간 돌아가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에요. 할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맙구나, 엘아. 할아버지도 엘이가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사는 모습 보고 싶다만,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러려면 90이 넘도록 살아야 하니까 지금부터 건강관리를 잘해야겠구나.’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성경에 보니 900살이 넘도록 산 사람들도 있잖아요. 할아버지도 900살이 될 때까지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아담이 정말 930세에 죽었나요? 어떻게 이때의 사람들은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었지요? 왜 지금은 100살까지 살기도 힘들지요?’
‘글쎄 말이다. 그때는 환경이 오염되지 않아 공기도 좋고, 물도 좋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아담의 세포와 지금 인간의 세포 사이에 어떤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는 1년 단위가 지금과는 달라서 그런 걸까? 할아버지도 잘 모르겠구나.’
‘할아버지, 참 이상해요. 할아버지는 전부 다 알 것 같은데 제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할아버지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요.’
‘허허. 내가 헛똑똑이인가 보다. 어떨 때는 어린 네가 더 잘 아는 것 같아 더 그렇구나.’

‘ㅋㅋㅋ 할아버지가 모를만한 질문 또 하나 할 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좋아하셨는데, 그런 인간이 왜 죽는지 말에요? 혹시 하나님께서 불완전하게 만드신 건가요?’
‘오늘도 정말 어려운 질문을 하는구나. 대답하기 전에 나도 너에게 질문을 하나 하마. 네가 만화로 된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을 때 어디까지가 신들의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이야기인지 구별할 수 있었니?’
‘아니요, 할아버지. 그냥 신들의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로 읽기도 하고, 인간의 이야기를 신들의 이야기로 읽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신들의 이야기가 인간의 이야기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어요. 신들도 인간과 똑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어요.’
‘그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신들의 이름을 빌려 했다고 할 수 있다는 거지?’
‘맞아요, 할아버지. 인간이 서로 싸우고, 사랑하고 하는 이야기를 신들의 이름으로 대신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가족과 친구와 이웃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슬퍼하기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하는 갈망도 가졌을 거다. 네가 할아버지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네가 할아버지에게 질문한 것처럼 그때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 일반 부족민이 족장에게 인간은 왜 죽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거야. 이런 질문을 받은 이들은 아마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을 게다.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의 결과라 할 수 있지. 이것은 너도 알 테니 말이다.’
‘맞아요, 할아버지. 그건 저도 알아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렇단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란다.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이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져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인간이 왜 죽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지역마다, 민족마다 조금씩 다른 생각을 했단다. 창세기에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왜 죽는다고 생각했는지 넌 알고 있지?’
‘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요.’
‘정말 잘 아는구나. 그렇단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을 신과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려 하였단다. 신과 인간의 삶의 영역이 뒤섞여 있던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이런 신화적인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지. 신화적 세계에서 신은 항상 말하는 자의 위치에 있었고, 인간은 듣는 자의 위치에 있었단다. 다시 말해, 신은 명령하고, 인간은 순종하는 관계에 있었지. 신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었고. 바로 이러한 신화적인 사고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했지. 네가 말한 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그만 그 열매를 따 먹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거야.’

‘할아버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열매를 먹은 결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건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지금도 있나요?’
‘할아버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어려운 질문을 또 하는구나. 할아버지도 그 나무의 정체를 알기 위해 수많은 문자를 읽었다만 아직도 잘 모른단다. 이런저런 해석의 길을 거쳐 지금은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인식의 나무> 정도로 이해하고 있단다. 단순히 알고 깨닫는 능력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발명하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인식 말이다. 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수수께끼를 내마.’
‘수수께끼라면 자신 있어요. 그리스-로마 신화만큼이나 수수께끼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그래? 그럼 우리 손주가 어느 정도 아는지 어디 한번 보자. 이쪽 오른손에 선한 것이 있고, 이쪽 왼손에 악한 것이 있단다. 이처럼 양극을 표현해주는 낱말 쌍을 찾는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할아버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좀 쉽게 설명해주세요.’
‘네가 내가 요즘 하는 성경 공부에 참석하시는 분들이 가끔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구나. 그래 좀 쉽게 설명하마. 여기 오른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이 어디지?’
‘동쪽이에요.’
‘그렇지. 그럼 이 왼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은?’
‘서쪽이에요.’
‘참 잘 아는구나. 이제 할아버지 오른손에 선한 것이 있고, 왼손에 악한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완전히 서로 다른 방향이 있지? 이처럼 완전히 다른 방향의 끝에 있는 것을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고 있니?’
‘음, 힌트 좀 주세요.’
‘북극과 남극을 생각해보렴. 에구~~, 내가 답을 너무 쉽게 추리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네.’
‘아, 알았어요. 극과 극에 있다는 말이죠?’
‘그래 맞다. 참 잘 아는구나. 그럼 선한 것과 악한 것처럼 서로 극과 극에 있는 쌍을 찾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이미 할아버지가 다 가르쳐주셨네요.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요.’
‘그래. 정말 잘 아는구나. 혹시 다른 쌍도 아는 것이 있니?’
‘음, 음... 아, 하늘과 땅요.’
‘그래. 바로 그거다. 하늘과 땅을 안다고 하면 무엇을 의미할까?’
‘아, 할아버지. 이제 알 것 같아요. 하늘과 땅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래, 맞다. 그럼 할아버지가 또 한 가지 문제를 내마. 문제라기보다는 너의 선택을 묻는 것이다. 네 앞에 두 장의 카드가 있는데 두 장 중에 너는 한 장만 선택할 수 있단다. 한 장의 카드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카드 위에는 <축하합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쓰여 있지. 넌 이 두 카드 중에 어떤 카드를 선택하고 싶니?’
‘전 영원히 산다는 카드를 선택하고 싶어요. 죽는 것이 무섭거든요.’
‘1분의 시간 여유를 줄 테니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고 선택해 보아라.’

손주는 이 카드, 저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이러저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1분이 지나자 처음과는 달리 지식 카드를 선택합니다. 할아버지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처음엔 영원히 사는 카드가 좋은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지식 카드가 더 나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영원히 사는 방법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는 솔로몬의 지혜 못지않은 손주의 대답에 탄복합니다. 동시에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함정을 직시합니다. 지식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명성을 쌓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꿰뚫어 봅니다. 어쩌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간파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가진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타자를 ‘그것’으로 만들고, 문명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타자를 굴복시키고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문화의 양산 말입니다. 이것을 죽음보다 더 무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앎이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것을 목도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뱀의 속임수로 이러한 앎의 왜곡이 일어났고, 이 왜곡된 앎의 문법에 사로잡힌 인간은 가인처럼 살해자로, 바벨탑을 세운 자들처럼 자기 명예 추구자로 전락할 수 있음을 실존적으로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 창조 이야기에 인간이 죽음의 문화로 치닫게 된 근원적인 이야기를 담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얘야, 네가 점점 자라면서 더 많이 알게 되는 지식으로 무엇을 하고 싶니? 이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너의 우주는 에덴동산이 될 수도 있고, 바벨탑을 세우는 곳이 될 수도 있단다. 너의 지적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너의 우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수도 있고, 신음이 끊이지 않는 지옥이 될 수도 있단다. 나는 네가 가진 지식으로 죽음에 이르는 삶이 아니라 생명을 낳고 키우는 창조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날 밤, 손주는 꿈을 꿉니다. 꿈속에 그는 에덴동산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아담과 하와를 보고, 동시에 멀찍이서 그들을 슬픈 모습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후회의 말을 듣습니다.

‘어떻게든 설득하여 아담과 하와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해야 했는데... 당연히 그것을 택할 줄 알았는데 내가 그들을 너무 믿었구나. 이제 어찌하나. 다른 길이 없구나. 내가 다른 나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수밖에. 다른 나무? 그렇다. 나 스스로 지고 가야하고, 내가 달려 죽어야 하는 나무 말이다. 내가 창조한 인간을 이렇게 어둠 속에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나 스스로 아담이 되는 수밖에.’

하나님의 이 후회의 말을 듣는 손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
그가 택한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담고 있는 사람을 죽음의 감옥에 영원히 가두지 않으시겠다니요?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담이 되어 생명을 길을 여시겠다니 그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에 사로잡혀 우리가 가지게 된 지식을 생명을 풍성히 하는 곳에 사용하겠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주시고 용기를 주옵소서.
아담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강치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