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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주의 『상동청년 전덕기』

ree610 2017. 3. 28. 21:09

전덕기의 개인 전기를 훨씬 뛰어넘는 역저
  이덕주의 『상동청년 전덕기』공옥출판사

 

이덕주 교수가 정성 들여 쓴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민중을 구하고 구국의 길을 연 선한 목자’ 『상동청년 전덕기』를 며칠 동안 꼼꼼하게 읽었다. 밑줄을 그어가며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며 읽는 동안, 새로운 보화를 발굴했다는 기쁨과 감동을 맛보게 되었다. 최근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서 드물게 보이는 역저라고 본다. 저자 이덕주 교수와 공옥출판사에 치하의 뜻을 먼저 전한다.
이 책의 주인공 전덕기(全德基, 1876-1914)는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38세로 요절한 ‘민중목회자’였다. 그의 출생은 음력으로는 이승만(李承晩)과 같으나 양력으로는 김구(金九), 주시경(周時經)과 같은 1876년이다. 이해는 한국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어 국교를 시작한 해로, 이해에 출생한 이들은, 의식이 있다면, 숙명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덕기는 9세 때에 조부와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전성여에게 입적되어 숯장수 일을 돕다가 16세 되던 1892년에 미 북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 가정에 고용되어 새로운 세계를 맞게 되었다.
스크랜턴 선교사에 고용되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4년 후인 1896년에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입교, 2년 후에는 속장 및 유사를 맡게 되었다. 1900년부터 그는 미 감리회 목회자 양성 과정인 신학회에서 신학수업을 시작했고, 그 이듬해에는 권사로서 실질적으로 상동교회 목회에 나섰으며, 1902년에는 미 감리회 연회에서 상동교회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이어서 1904년에는 상동교회 협동목사를 거쳐, 1905년 초에 미 감리회의 집사 목사로 안수됨과 동시에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는데, 이해 11월 17일에 강제된 을사늑약으로 상동교회는 연인원 수천 명이 눈물바다를 이루는 우국적인 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가 미 감리회의 연회에서 장로목사로 안수받게 된 것은 6년 후인 1911년이다. 그가 목회하는 동안 상동교회는 한말 많은 도전을 받으면서도 영적 부흥을 도모하여 서울 시내에서 회원 수가 가장 많은 교회로 성장했고, 연화봉교회 등 6개의 지교회도 개척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전덕기 목사의 일생을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이라는 현대적 과제를 다분히 의식하면서 쓴 전기이다. 저자는 주인공의 위와 같은 목회수련 및 목회활동을 인생행로의 날줄로 하고, 날줄이 뻗어나는 시기마다 부여된 청년회 활동, 출판 활동, 교육 운동 및 구국 운동 등을 씨줄로 엮어 나갔다. 주인공은 그의 공적 삶을 상동교회 엡웟청년회 활동에서 시작했다. 그가 담임목사가 된 1905년에는 청년회 주도로 멕시코 이민동포 실태조사단 파견 운동을 전개했고, 그해 을사늑약이 이뤄지고 구국기도회와 시국토론회, 을사늑약 반대 도끼상소(持斧上疏)까지 감행하게 되자, 친일감독(M. C. 해리스)을 받들고 있는 스크랜턴으로서는 엡웟청년회를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전덕기 목사는 교육, 사회, 민족 운동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책무와 사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쇠락해가는 국권을 의식하면서 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고 헤이그특사 파견에 힘쓴 것은 구국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이와 더불어 전개된 사회 민족 운동 또한 이루 매거할 수 없다. 한 지역교회 목회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같은 엄청난 사역을 그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깊은 영성 못지않게 사회와 나라도 한 목장일 수 있다는 그의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 때문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저자는 전덕기 목사의 목회가 민중을 끝까지 포용한 데서 빛을 발한다고 본다. 조실부모하고 시장판에서 자란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민중의 애환이 서린 남대문시장과 상동교회를 떠나지 않은 목회자로 일관했다. 그가 소천하자 민중이 오열하며 10여 리나 되는 장례행렬을 이룬 것은 민중을 기반으로 한 그의 폭넓은 목회의 결실이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이렇게 썼다. “그 자신 ‘민중 출신’으로 기독교인이 되어, 기라성 같은 민족운동가들을 지휘하는 독립운동 지도자가 되었음에도, 자신을 길러준 남대문 시장바닥을 떠난 적 없이, 상동교회 목사로서 장터와 거리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요, 보호자가 되었던 ‘민중목회자’, 전덕기 목사의 마지막 길도 민중의 배웅으로 이루어졌다. 민중으로 시작해서 민중으로 끝낸 목사의 일생이었다.”(524쪽)
이 책은 전덕기 목사의 단순한 전기나 평전이 아니다. 전덕기 목사 시대의 상동교회 역사이면서, 한국 감리교회 역사이며, 더 나아가 그 시대의 한국 교회사와 한국의 당대사를 조명한 역저인 것이다. 이 책에는 한국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교회사의 교육·문화·민족 운동사가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전덕기 목사와 상동교회 및 한국교회가 한말 일제강점 초기의 교육·문화·민족·독립 운동사의 관점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전덕기 목사의 개인 전기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 교회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문화·독립 운동사의 관점에서 재음미해 볼 수 있는 귀한 역저임이 틀림없다. 600여 개가 넘는 자료를 촘촘하게 전거로 제시하면서 그동안 선학들이 분명한 거증자료 없이 활용한 전승상의 오류를 바로잡아 준 것은 저자의 학문적 엄정성과 이 저작의 높은 신뢰성을 담보해준다.
이 저술은 저자의 30여 년에 걸친 관심과 천착이 온축된 결실임을 환기시키면서 학계와 교계의 큰 수확임을 첨언하고 싶다. 한국 교회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기고 있는 저자는 이 저술의 주인공인 전덕기 목사를 두고 1987년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민중·민족 목회자 전덕기”(1987)로 시작하여 전덕기 목사의 믿음의 부모인 “스크랜튼 가족의 선교활동”(1988), “남대문 시장바닥의 민중 목회자 전덕기”(1990), “전덕기 목사의 민중목회론”(1995), “전덕기 목사의 민주목회와 민족운동”(1995), “전덕기 목사의 생애 재구성”(1998), “전덕기 목사의 생애와 사상”(1998), “전덕기, 왜 전덕기인가”(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 2014) 등의 논문과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한 『스크랜턴: 어머니와 아들의 조선 선교 이야기』(2014)를 거쳐 이 책이 상재되었다.
한국교회가 비판과 비난을 받고 있는 이 시기에 한국교회에 희망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전덕기 목사의 전기가 나왔다는 것은 섭리적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이 한국 기독교인들 특히 감리교인들에게 많이 읽히기를 원한다. 특히 교회성장의 단물을 빨아먹고 있는 목회자들이 꼭 읽어서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 한국교회를 이토록 성장시킨 개척 목회의 진면목이 어땠는가를 되돌아보며 현재를 반성했으면 한다. 이것은 예사(禮辭)로 하는 말이 아니다. 전덕기 목사는 바울이 말한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는 그 말씀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예수의 당부를 몸소 실천한 몇 안 되는 목회자 가운데 한 분이기에 한국교회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꼭 읽어 참 목회자의 길을 본받았으면 한다. 성(聖)과 속(俗), 정치와 종교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놓고 자기 검열로 목회의 범주를 한정하려는 이들이나,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에 걸쳐 복음의 무변장원(無邊長遠)함을 새롭게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각오하는 이들에게 전덕기 목사는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올 것으로 기대한다.
독자층을 넓히기 위해서는 자료 제시를 효율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문 자료와 자료 풀이를 이중으로 제시한 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이 저술의 가독성(可讀性)과 전파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가능하다면 감리교회의 독특한 용어에 대한 해설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연부역강한 저자께 ‘연구와 저술의 축복’이 날로 새로워지기를 기원한다.

이만열 |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등이 있다.

 
 
 

2017년 2월호(통권 6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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