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욘 1:11~15, 막 4:11~15)
바다에 파도가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나니, 사람들이 또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우리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뱃사람들은 육지로 되돌아가려고 노를 저었지만, 바다에 파도가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났으므로 헛일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부르며 아뢰었다. “주님, 빕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은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다. 폭풍이 일던 바다가 잔잔해졌다.(욘 1:11-15)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막 4:35-40)
배 그리고 물
군주민수!(君舟民水). 말 그대로는 군주는 배이고 백성을 물이라는 말이지요.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어 버리듯이, 백성이 분노하면 왕을 뒤엎는다는 뜻입니다. 국민을 물로 보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추악하고 해괴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온 국민이 참담하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한 국민이 노하여 촛불의 파도를 일으켜서 대통령을 탄핵하였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배를 뒤엎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물을 잘 알고, 물을 정녕 두려워할 줄 알고 따르는 새로운 배를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사태는 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월호이지요. 세월호라는 배는 악하고 참람한 권력의 꼴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생각하기보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추악한 탐욕만을 추구하는 배였습니다. 불의와 불법으로 건조한 배입니다. 거기에다가 사악한 종교까지 야합했지요. 바리새파라는 열혈 종교와 헤롯당이라는 음란한 권력이 야합하고 음모를 꾸며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탐욕과 교잡한 종교가 얼마나 사악하고 끔찍한 것인지를 세월호는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유족들을 비난하고 조직적으로 음해한 비열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이들을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월호는 한마디로 사탄의 괴수 맘몬의 배였지요. 그렇게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짓과 불법과 음모로 가득한 배가 바다에 빠지고, 순결한 생명들이 희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라도 빨리 그 배를 들어 올려서 진실을 낱낱이 밝혀야 합니다.
두 배 이야기
배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오늘은 성서에서 풍랑을 만나 위험에 빠졌지만, 바다에 침몰하지 않고 무사히 항해를 마친 두 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역사도 바다를 건너는 항해와 같다고 말하지요. 바다에는 파도가 없을 수 없듯이,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역사에도 거칠고 위험한 파도가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도 두렵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만큼 거센 바람과 파도가 휘몰아쳐 오기도 합니다. 또 우리 역사는 어느 때보다 거센 파도를 만나서 아주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성서의 바다 이야기를 통해서 바다는 어떻게 건너가야 하는지, 위기는 어떻게 극복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좀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나의 배 이야기와 예수님과 제자들의 배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저자가 의도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요나 이야기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다를 건넌 이야기는 비슷한 부분이 꽤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두 이야기 모두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거센 바람과 파도입니다. 두 번째로, 바다를 건너는 이유, 그 목적도 유사합니다. 요나는, 반대쪽으로 도망치기는 했지만,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귀신이 나간 뒤에 거라사의 광인은 데가볼리로 갔는데, 데가볼리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이방인 퇴역 군인들을 위해 로마가 건설한 열 개의 신도시입니다. 바빌론의 큰 도시 니느웨가 요나 시대에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곳이었다면, 예수님 시대에 데가볼리는 갈릴리 지역에서도 특히 부정하게 간주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2,000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있었지요. 유대인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부정한 짐승이 로마 군단처럼 많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폭풍이 거세서 배가 뒤집힐 지경인데 요나도 예수님도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요나는 배 밑창에서 깊이 잠이 들었고, 예수님은 뱃고물에서 아예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네 번째로, 결국 바다는 잠잠하고 고요해졌고, 무사히 항해를 마쳤습니다.
나를 던지시오
먼저 요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요나의 배는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풍랑을 극복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배는 왜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일까요?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다를 우습게 여기고 바다를 거스르는 배가 풍랑을 만나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도망치는 요나의 배는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바다와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는 니느웨로 가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니느웨와는 정반대인 스페인으로 가는 배였지요.
폭풍을 만난 요나의 배는 바람에 맞서 노를 젓고, 무거운 짐을 다 내버리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배가 부서질 지경이 되자, 그때야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 사태에 이르렀는지 제비를 뽑아서 밝히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비를 뽑았을 때, 제비는 배 밑창에서 잠든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요나 때문이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도망쳤기 때문에 바다가 노하고 풍랑이 배를 위협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요나의 말입니다. “나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이 모든 사태의 원인입니다. 그러니 나를 바다에 던지십시오.” 요나는 요즘 나라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도, ‘나는 아니다, 나는 도무지 모른다.’고 뻔뻔하게 모르쇠 잡는 철면피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무리 위기라 할지라도, 그 위기의 원인을 알고, 그 잘못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요나는 비록 자기의 뜻과 다르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쳤지만, 자기 잘못을 알고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그렇게 해서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바다는 고요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비록 요나 때문에 풍랑을 만나 생고생을 했지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를 차마 던질 수 없어서, 다시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보았습니다.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기꺼이 책임을 지려는 요나와, 그런 요나를 그래도 지켜주려고 애쓰는 뱃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요나와 뱃사람들의 짠한 인지상정! 참 감동적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장면을 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쨌든 아무리 애써도 풍랑이 멈추지 않자 사람들은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폭풍이 일던 바다는 잠잠해졌습니다. 성난 바다는 그렇게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요나로 인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졌습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예수님과 제자들도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 또한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파도가 뱃전을 때리고 물이 차서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배도 뒤집어지지 않고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지요. 이 배는 요나의 배와는 달리 도망치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바다 건너편 이방인의 땅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배였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무덤 사이에 사는데 쇠사슬로 몸이 묶여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마을이 아니라 무덤 사이에 살면서, 쇠사슬에 묶여 광란의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는 미친 사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 사람은 귀신이 들렸는데, 우선 그 귀신은 악한 귀신이라고도 하고, 더러운 귀신이라고도 합니다. 합하면 악하고 더러운 귀신이지요.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이방인과 관련된 듯 보입니다. 이방인은 부정하다고 간주되었지요. 게다가 이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의 이름은 로마 군단을 지칭하는 ‘레기온’이었습니다. 쫓겨나가는 귀신이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게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떼 귀신이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한 일을 당했기에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까요?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절박했으면, 예수께서 이미 늦은 저녁인데도 위험한 바다를 건너 그곳으로 가자고 재촉하시고, 귀신을 만나자마자 ‘벌써’(막 5:8) 그 귀신에게 나가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어쨌든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배는 무사히 항해를 마쳤습니다. 제자들의 배는 어떻게 풍랑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잘 모르기는 해도,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으니까,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바람과 파도를 이겨보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목수라고 알려져 있지요. 바다의 생리야 목수보다는 바로 그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 훨씬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바람과 파도는 잦아들지 않았고, 마침내 파도가 배 안까지 들이치고 바닥에는 물이 차올랐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깨워야지요. 깨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프로포폴을 맞으신 것도 아닌데, 당연히 깨워야지요. 혹시 이깟 풍랑 하나 못 이기느냐고,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꾸중 좀 들으면 또 어떻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이 우리 배 안에 함께 계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시냐고 투정도 부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일어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그리하여 마침내 바람은 잦아들고 바다는 고요해졌습니다.
되짚어보면, 요나의 배 사건에서는 요나가 비록 잘못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농단했지만, 그래서 거센 폭풍을 만났지만, 그래도 자기 잘못을 깨닫고 고백했지요. 자기 잘못을 아는 것, 그것을 고백하는 것,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자기 잘못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제자들의 배는 자기들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에 예수님을 깨워서 풍랑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명령하시는 예수님이 계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내친김에 배 이야기를 좀 더 넓혀보면, 노아의 배도 있었습니다.(창 7장) 노아의 배는 홍수로 엄청나게 불어난 물 위를 떠돌았습니다. 40일 동안 홍수가 퍼부어서 150일 동안 물이 땅을 뒤덮은 대홍수였지요. 온 땅이 바다가 된 셈입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의 물이 성난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실 만큼 지독한 인간의 악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인간을 홍수로 심판하셨고, 노아의 배는 구원의 배였습니다. 그 노도와 같은 홍수에서 노도 없고 돛도 없는 노아의 배는 다만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아라랏 산정에 다다랐습니다.
바울도 선교 여행의 막바지 로마로 가는 항해에서 풍랑을 만났지요.(행 27장)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유라굴로’라는 신화적 폭풍입니다. 폭풍을 만난 바울의 배는 노도 잃고 돛도 잃고 짐도 다 내버리고 멍텅구리 배처럼 바다를 떠돌다가 부서졌습니다. 그렇지만 바울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로마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의 배는 폭풍에 난파되었지만, 그 위험한 때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기에,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배도 바울의 배도, 요나의 배도 제자들의 배도, 모두 거센 풍랑을 이기고 무사히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이루어야 할 소명도 잘 이루었습니다. 다행 아닙니까? 위험을 당하기는 했지만, 물이 배를 뒤엎어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인생, 역사 그리고 바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인생과 세상을 바다와 같다고 했습니다. 언제 어디로부터 파도와 풍랑이 닥쳐올지 모르는 바다 말입니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어떤 존재가 바다를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용왕이 있듯이,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제우스의 동생 넵튠(포세이돈)이 있었습니다. 석양이면 황홀한 황금마차를 타고 바다를 시찰하는 위력적인 신. 그에게 누가 대적한다는 말입니까. 구약성서 시대에도 사람들은 바다 괴물을 두려워했습니다. 대양을 바닥에서부터 휘젓는 용,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레비아단과 라합 등입니다. 누가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다는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영역이었습니다. 바다는 인간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 바다조차도 저 신화적인 괴물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저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조차도 하나님께는 그저 장난감 같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시 104:26, 욥 41장) 바람과 파도도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 안에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도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풍랑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무엇이 두렵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저 바람과 파도를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다를 건너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바다를 건너는 항해와 같다면,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우리는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돌이킨다면, 그 풍랑은 우리를 죄악의 길로부터 지켜주는 은총의 채찍이 될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때, 그때에도 배는 흔들립니다. 밖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도, 파도가 밀려오기도 합니다. 위험은 바깥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지요. 배 안으로부터 물까지 차오르면 또 얼마나 다급하고 무섭습니까. 우왕좌왕 갈팡질팡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털썩 주저앉고 싶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때 배 안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서재경 | 한신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신약성서신학을 전공하고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한신대, 강남대, 여신도교육원 등에서 성서를 가르쳤으며 현재 수원 한민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말씀이 우리를 읽을 때까지』, 『슬픔이 슬픔에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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