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성령강림후 8째 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더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성령강림절 기간을 12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암 7:7-15; 시 85:8-13; 엡 1:3-14; 막 6:14-29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아모스 7:7-15}
7 주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셨다. 다림줄을 드리우고 쌓은 성벽 곁에 주께서 서 계시는데 손에 다림줄이 들려 있었다.
8 주께서 나에게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다림줄입니다" 하니, 주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9 이삭의 산당들은 황폐해지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파괴될 것이다. 내가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겠다."
10 베델의 아마샤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알렸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나라 한가운데서 임금님께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11 아모스는 '여로보암은 칼에 찔려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사로잡혀서, 그 살던 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12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야, 사라져라! 유다 땅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말아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다."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러나 주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다.
[신학적 관점]
성서학자들은 제1성서가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BCE 8세기 이후 문서로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아모스를 비롯한 미가, 호세야, 이사야 등 여러 예언자들이 활동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제1성서의 형성과 맞물려 성서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신이 바로 예언자 정신임을 말하고 있다. 제1성서는 크게 율법서 역사서 예언서 시문학서로 분류한다. 이중 예언서는 제1성서에서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고 민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로봇은 아니다. 때로 그는 백성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의 뜻을 바꾸소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암 7:2-3).
흔히 우리는 예언(豫言)이라는 단어 때문에 예언자들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쉽게 갖게 된다. 예언자를 뜻하는 히브리어에는 ‘나비’ ‘호제’ ‘로에’라는 단어들이 있다. ‘나비’는 신으로부터의 계시를 전달하는 사람(預言)이라면 ‘호제’나 ‘로에’는 황홀한 경험을 통해 보통사람이 모르는 신비한 것을 꿰뚫어보는 예언(豫言)자 곧 선견자(先見者)를 말한다. 이스라엘 왕정 이전에는 이 두 성격을 다 갖고 있었지만, 왕정이 확립된 이후부터는 환상을 통해 미래의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는 ‘호제적’인 기능은 가나안 이방종교의 것으로 비판받고 현실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나비적’인 사회비판적 기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물론 예언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왕정에 반대하는 체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체제 옹호적인 그룹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다윗 왕 때에 나단 같은 예언자는 다윗왕의 불륜을 비판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다윗 왕과 더불어 왕권을 확립해간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사울 왕 또한 예언자 그룹의 한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다. 성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까지도 예언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예언서는 아모스로부터 시작한다.
아모스를 문서 예언자 중 첫 번째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서 비로소 예언의 내용이 그대로 보전되어 경전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모스 이전의 예언자들 곧 엘리야나 엘리사나 나단과 달리 사람들은 왜 그의 말을 보존하려고 하였을까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아모스의 말이 이제껏 들어본 것과는 달리 국가권력과 종교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 곧 민중의 편에 섰다는 것이다.
아모스는 일명 정의의 예언자라고 불린다. 그는 솔로몬 왕 이후 나라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며 살던 때에 남 왕국 출신으로 북 왕국에 가서 활동을 한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당시 주변의 강국인 아시리아와 시리아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북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에 나라는 매우 부강하였다. 이때 아모스는 메뚜기떼의 환상, 다림줄의 환상 등 몇 가지의 환상을 보고 하느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목회적 관점]
예언자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손에 붙잡히면 예언자가 된다. 자신이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거부할 수도 없다. 이것이 소명이다. 아모스는 애당초 예언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농부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생활목회자(평신도)이다. 이는 오늘날 목사와 당회가 최고의 권력 기구로서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하느님의 말씀은 목사나 당회(‘아마샤’)가 아닌 일반 신도를 통해서 들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에 동의할 수 있을까? 개신교와 가톨릭의 근본 차이 중의 하나가 만인사제직이다. 한국교회를 향한 오늘의 다림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주석적 관점]
일부 주석가들은 제1성서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단어 ‘anak을 다림줄로 번역한 것은 잘못으로 중세시대 교부들의 추측일 따름이고, 이는 본래 아카디어의 ‘주석(朱錫)’을 뜻하는 것으로 철과 같이 모든 것을 부수는 강력함의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를 가리켜 선견자(‘호제’)라고 부른다. 곧 아마샤는 아모스가 갖는 예언의 ‘나비’적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당시의 죄악상이 드러나지만, 그 죄악상이라고 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어느 시대에나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부자라고 으스대고 상아 침대에서 뒹굴고 보료 위에서 기지를 펴며 몸에는 향유를 바르고 술은 대접으로 퍼마시는 일은 오늘의 시대에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큰일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이는 큰일이 아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를 큰일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침소봉대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작은 일에도 철저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유대 사상가 아브라함 헤셀은 ‘예언이란 하느님이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라고 빌려주신 말이며 착취당한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불경한 부자들에게 내리신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접촉점이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선과 악에 관계된 일이라면 그 어느 것도 작게 보거나 지나쳐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반면 그리스의 ‘신들은 큰일에만 몰두하고 작은 일들은 무시한다’고 철학자 키케로는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시대에 교회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개인의 성공과 물질의 축복을 남발하고 세상일은 염려마! 하고 말한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하고 그저 하늘만 쳐다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곧 하느님이 통치하는 그날이 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아모스는 말한다. “야훼께서 오시는 그날이 밝은 날일 줄 아느냐? 아니다. 그날은 다만 깜깜할 뿐 한 가닥 빛도 없으리라.” 그러면서 교회 예식을 부정하는 엄청난 발언을 한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을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려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5장 21-24절)
오늘날의 용어로 바꿔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모이는 심령부흥회니
40일 금식새벽기도회니
그런 것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너희들이 바치는 십일조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교회를 크게 지어 바친다 하더라도 나는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손을 들고 부르는 찬양의 노래를 집어치워라.
파이프 올갠과 피아노소리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사실 예언자 아모스의 말씀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존재 논쟁이나 영혼 구원과 내세와 같은 교리 얘기는 전혀 없다. 그는 다만 당시의 가장 가난한 자들 곧 과부와 고아들이 당하는 아픔을 보게 만들고 재판의 부정과 정치판의 뇌물들을 말하고 시장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돌아보게 한다. 그의 눈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약자들의 삶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고 그의 귀는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부 관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두운 밤에만 외출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편에 서서 그는 이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고 있다.
예언자들이 관심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역사이다. 힘없는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민중의 역사요 바닥의 역사이다. 우리는 예언자들의 글을 읽으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느긋하게 안정을 즐기던 양심이 마구 뒤틀린다. 그들은 ‘노래하는 성자’도 아니고 ‘도리를 가르치는 시인’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습격하는 자이며 양심이 끝나는 곳에서 그의 말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권력의 중추에 있는 왕과 제사장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12, 13절) 그리하여 그들은 예언자 아모스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자라고 공격한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시편 85:8-13}
8 나는 듣나니, 야훼께서 무슨 말씀 하셨는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그것은 분명히 평화, 당신 백성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 또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 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주시는 평화로다.
9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드시리라.
10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11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12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 주리라.
13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 가리라.
{에베소서 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5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6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서, 그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10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11 모든 것을 자기가 뜻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14 이 성령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합니다.
[신학적 관점]
구원에 관한 신의 택함과 예정 그리고 성령의 인치심과 하늘의 신비한 복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씀은 이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지만, 이는 잘못하면 신앙을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오류로 이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만일 택함의 기준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라면 믿음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며 이때 인간과 로봇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반대로 신이 만약 인간 모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면(10절), 제자도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자유주의 사상이 대세인 오늘날,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사회에서 구원에 관한 교회의 이러한 기독론에 기반한 일방적인 주장은 유아독존적인 가르침으로 거부당하기 쉽다. 따라서 본문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신앙 대신에 에베소교회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에서 본문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우선 본문은 결코 교리적 관점에서 고백된 글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로마 황제숭배가 지배적인 사회였다. 특히 에베소는 아데미여신 숭배가 성행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은 사회로부터의 핍박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고백이었으며 이미 바울 일행은 이러한 핍박을 당한 바 있다(행 19:21-41). 감사와 찬양으로서의 구원의 고백은 동의하지 않는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신앙이 아닌 삶의 모범으로서의 자발적 헌신을 통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목회적 관점]
7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받았다는 (代贖)론은 기독교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 되는 칼날의 양면과 같다. 이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라는 점에서는 장점이 되지만, 이에 응답하는 인간 주체로서의 자아가 상실되었다는 점에서는 단점이 된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대속 신앙과 더불어 기쁨과 감사의 응답으로서의 자속(自贖) 신앙이 요구된다.
구원은 하느님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는 에베소서의 가르침은 당시 모세 율법에 기초한 유대교나 동물 희생 제사에 기반한 이방 종교가 갖고 있는 인간 행위 중심의 구원의 가르침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이해해야지 절대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주석적 관점]
에베소서는 바울의 제자가 쓴 글이라고 하는 점은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초기 사본에는 아예 ‘에베소’라는 단어조차 없다.
3-12절의 주어는 ‘우리’이다. 곧 유대인과 이방인을 통칭하고 있다. 11절과 12절의 ‘우리’는 맨 먼저 상속자가 된 유대인을 칭한다. 그리고 13절에서 주어가 ‘여러분’ 곧 이방인으로 바뀌었다가 14절에서 ‘우리’는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유대인과 이방인을 통칭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을 사탄의 괴수라고 칭하고 자신 안에 선과 악이 다투고 있음을 한탄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고 고백하였음을 알고 있다(롬 7:14 이하).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고백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을 맛본 그의 삶 마지막 시기에 이르렀을 때의 고백이다. 곧 구원이란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투쟁임을 말하고 있다. 본문의 감사와 찬양과는 거리가 먼 고백이다. 그러나 이 둘의 신앙고백은 서로 대치되는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변증법적으로 상승 보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마가복음 6:14-29}
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15 또 더러는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헤롯은 요한을 잡아 오게 하여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헤롯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므로,
18 요한이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요한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을 청하여 놓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22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왕은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보아라. 내가 들어주마" 하였다.
23 그리고 그 소녀에게 굳게 맹세하기를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하였다.
24 소녀가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요?"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25 소녀는 급히 왕에게로 돌아와서 "곧바로 이 자리에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내게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한 것과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소녀가 달라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27 그래서 왕은 곧 시위병을 보내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시위병은 나가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서,
28 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무덤에 안장하였다.
[신학적 관점]
세례 요한이 헤롯이 베푼 잔치에서 그 목이 잘려 쟁반에 얹어져 살로메(헤로디아?)에게 전달되었다는 얘기의 역사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예수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자 그의 뒤를 이어 세상에 나왔고(1:14), 예수의 하느님 나라 복음 사역은 세례 요한의 부활로 오해되는 등, 헤롯왕의 권력에 맞서는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목회적 관점]
지도자는 말 한마디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헤롯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많은 손님들 앞에서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한다.(사실 땅의 분배는 로마황제가 결정하지 분봉왕인 헤롯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자기 과신은 자기 목숨을 재촉한다.
[주석적 관점]
마가가 즐겨하는 샌드위치 문학 양식 중의 하나이다.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련한 이야기이지만, 이는 앞 구절의 제자 파송과 뒤 구절의 오천 명 급식 기적 이야기 사이에 놓임으로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예수의 정체성과 예수가 추구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평등의 하느님 나라와 오만과 성적 타락과 권세자들의 잔치가 불러오는 무고한 살인의 세상 권력과의 근본 차이를 말하고 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해 마가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곧 민중소요를 염려하여 요한을 사해 부근 마케루스 요새로 옮겨 거기서 처형했다고.
[설교적 관점]
기괴하고 공포에 가득 찬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는 중세 시대에는 미술가들의 작품 주제가 되기도 했고, 오스카 와일드는 이에 관한 연극 대본(살로메)을 썼고, 리차드 스트라우는 성공적인 오페라의 주제로 사용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이 주제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마가는 세속 권력이 갖는 부패함을 민담의 형식을 빌려 고발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무고한 자들의 살해를 통해 공포정치를 곧잘 사용한다. 그러나 민중들은 일종의 유언비어(流言蜚語) 형식을 통해 이를 고발하고 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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