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을 삼키는 문명에 대한 경고 - 피를 먹지 말라 -
* 말씀: 레위기 17장 10-11절
"육체의 생명(네페쉬)은 피에 있음이라"(레 17:11).
피와 생명이 분리될 수 없음을 선언한다. 피는 단순한 체액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여기서 네페쉬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목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식탁 위의 규정을 넘어서는 문명론적 경고다. 인간이 타자의 생명을 내 욕망과 소비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선언이다.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사람에게는 내 얼굴에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 17:10-11)
1. 생명(네페쉬)의 불가침성: 피, 곧 생명은 하나님의 것
본문은 피를 금지하면서, 동시에 그 이유를 밝힌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그것은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라는 요구이다. 피를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자기 소유로 삼으려는 태도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다. 따라서 피를 먹는 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그 얼굴을 돌이키신다(레 17:10). 이것은 철저한 ‘관계의 단절’이다.
2. 타자의 피를 삼키는 문명: 폭력과 착취의 구조
인간 문명은 오래도록 누군가의 피를 먹으며 유지되어 왔다. 전쟁은 가장 노골적인 폭력이고, 착취는 가장 교묘한 폭압이다. 국가 권력과 시장 권력, 제국의 논리와 경제 체제는 때로 사람을 얼굴로 보지 않고 자원으로 간주한다. 바로 그 때 문명은 생명을 살리는 질서가 아니라 생명을 삼키는 체제가 된다. 타자의 생명을 착취하고 소비하는 모든 구조적 폭력이 '피를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금지 명령은 돈과 권력과 제국을 탐식하는 문명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묻고 계신다.
“너희는 어찌하여 타자의 생명 위에 너희 번영의 문명을 세우려 하느냐?”
3. 속죄의 피: 삼키는 문명을 뒤집는 예수 그리스도
레위기 17:11의 후반부는 결정적 전환을 이룬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서 너희 영혼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피는 금지의 대상인 동시에, 하나님이 직접 주신 속죄의 선물이다. 죄를 지은 생명(네페쉬)를 위해 다른 네페쉬가 대신 쏟아진다. 생명 대 생명, 이것이 구약 속죄의 원리이다.
히브리서는 이 원리를 기독론적으로 뒤업는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구약에서 짐승의 피는 그림자였고, 그리스도의 피는 실체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인간이 타자의 피를 삼키며 살아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내어주심으로 그 구조를 뒤집으신다. 세상은 빼앗아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내어주어 살리신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며 십자가의 전복이다. 십자가는 폭력의 질서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자기 증여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에서 미사일이 민간인의 피를 쏟아내고 있다. 여성과 아이와 노인들이 폭격 속에 네페쉬를 잃어가고 있다. 레위기 17장의 "피를 먹지 말라"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다. 전쟁과 안보, 경제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피를 삼키는 문명에 대한 신적 거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거부를 넘어, "내 피를 대신 흘리겠다"는 하나님의 결단이었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지금도 전쟁의 잔해와 폐허 위에서 당신의 피를 흘리며 아파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물으신다. 특히 폭력의 힘을 지닌 권력자들에게 묻는다.
“너는 피를 삼키는 사악한 문명의 공모자인가, 아니면 자기 피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증인인가?”
하나님은 지금도 생명을 삼키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자를 찾고 계신다.
** 기도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삼키는 세상 속에서,
사람을 쉽게 소모품으로 여기는 우리의 완악함을 보게 하소서.
지구촌 곳곳의 전쟁터에서 피 흘리는 이들을 기억하소서.
상하고 신음하는 자들의 울음에 응답하여 주소서.
오늘도 우리는 생명을 삼키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자, 평화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