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8월 18일(오순절 후 13째) 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4. 8. 13. 19:16

2024년 8월 18일(오순절 후 13째) 주일 설교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본문]
  잠 9:1-6; 시 34:9-14; 엡 5:15-20; 요 6:51-58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잠언 9:1-6}

1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세워서 제 집을 짓고,
2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잘 만들어서, 잔칫상을 차린 다음에,
3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높은 곳에서 외치게 하였다.
4 "어수룩한 사람은 누구나 이리로 발길을 돌려라." 지각이 모자라는 사람도 초청하라고 하였다.
5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잘 빚은 포도주를 마셔라.
6 어수룩한 길을 내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명철의 길을 따라가거라" 하였다.

[신학적 관점]

잠언서는 오랜 시절에 걸쳐 형성된 지혜와 훈계의 책이다. 잠언서는 정의와 공평과 정직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1:3). 지혜는 신의 첫 번째 피조물로(8:23-25), 모든 피조물을 신의 길로 인도하는 신의 도구이자 (여성명사로서) 동반자이다. 본문은 지혜를 생명의 잔칫상을 차려주는 집(신전)의 주인으로 묘사한다. 이는 요한복음서 본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선포하는 일과 일치한다.

[목회적 관점]

사람은 청소년기에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한 미래 설계를 하게 된다. 이때 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존경하면서 그 삶을 따라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인물이 남긴 명언들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곧 지혜의 말씀이다. 교우들의 서로 다른 지혜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주석적 관점]

일곱 기둥은 커다란 신전을 뜻하기도 하고, 완전한 지혜를 상징하기도 하다. 고대 세계에서 일곱은 우주를 뜻했다. 곧 해와 달과 밤에 뚜렷하게 보이는 다섯 별로서 7일을 한 주간으로 설정했다.

[설교적 관점]

설교는 일종의 하늘나라 말씀의 잔치 자리이다. 잔치는 첫째 흥겨워야 한다. 둘째 빵의 풍성함과 맛있는 포도주가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배의 첫 번째 조건을 거룩함과 엄숙함으로 이해한다. 예배는 마치 어린 자녀들이 부모님 앞에 나아오는 것과 같다. 시무룩하고 무거운 얼굴보다는 약간의 소란스러움과 웃음소리가 퍼지는 잔치 자리가 되도록 한다.

{시편 34:9-14}

9 야훼의 거룩한 백성아, 두려운 마음으로 그를 섬겨라. 두려운 마음으로 그를 섬기면 아쉬울 것 없으리라.
10 맹수들은 먹이 찾아 배고플지 모르나 야훼를 찾는 사람은 온갖 복을 받아 부족함이 없으리라.
11 젊은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두려운 마음으로 야훼 섬기는 길을 가르쳐 주마.
12 즐거운 날을 보내고 싶으냐? 좋은 일을 보며 오래 살고 싶으냐?
13 혀를 놀려 악한 말을 말고 입술을 놀려 거짓말을 말아라.
14 못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여라.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에베소서 5:15-20}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
16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20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신학적 관점]

지혜로움이란 무엇인가? 첫째, 오늘을 마지막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는 현실 도피적 인간형이 아닌, 설사 내일 세상 종말이 온다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현실 책임적 인간형을 말한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곧 종말론적 인간형이다. 둘째,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노래하는 사람이다. 곧 공동체형 인간이다. 셋째,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곧 자기 한계를 알고 있는 인간형이다.

[목회적 관점]

남한의 개신교회는 세계교회 가운데서도 유독하게 음주와 흡연에 대해 율법적이다. 그러나 실제 사회생활에 있어서 남한처럼 음주와 흡연이 자유로운 나라도 없다. 흡연은 건강상의 이유로 자제가 되지만, 음주는 남한사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이다. 인구비례 술 소비량이 세계 2위의 나라이다. 일부 교인들은 음주 흡연에 자유로운 가톨릭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잘못하면 교회 안과 밖의 삶의 기준이 다른 이중 신앙인을 양산하기 쉽다.

[주석적 관점]

세월(시간)은 아낀다고 해서 재물처럼 쌓이지 않는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라는 말이다. 헬라어(exagorazo)의 본래 뜻은 시간을 속량한다 혹은 구속한다는 뜻이다. 속량, 구속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값으로 지불하고 다른 무엇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말한다. 곧 시간을 주고 내 안의 다른 무엇을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시간과 우리는 무엇을 맞바꿀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자유이다. 시간의 매임에서 시간의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시간을 잘 살리는 일이다. 이는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구별할 줄 알라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정작 중요한 일은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세월”은 물(物)적 시간인 chronos가 아닌 하늘의 때를 말하는 질(質)적 시간인 kairos이다. 곧 물량적인 시간을 주고 영원한 존재를 사는 것을 말한다. 나 자신을 부르시는 하늘의 존재를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을 구속하는 것이다.

[설교적 관점]

술에 취함과 성령의 취함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술에 취하면 자기중심이 되지만, 성령에 취하면 타자중심 곧 공동체 중심이 된다.

남아프리카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즐겨 쓰는 구호가 하나 있다. 이는 우분투(Ubuntu)이다.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이자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는 이 단어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라는 존재는 신비스러운 형태로 네 안에 붙들려 있다. 우리는 생명의 그물망에 서로 얽혀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닌 나는 어딘가에 속해 있고, 참여하고 나눔으로 참 인간이 된다. 우분투의 인간이란 개방적이고 베풀 줄 알고 타인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이 보다 큰 전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다른 사람이 굴욕을 당하고 약해질 때, 자신 또한 굴욕을 당하고 약해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Feasting 352)

남아프리카에서 한 백인 선교사가 초등학생 1, 2학년 학생들에게 달리기 게임을 시켰다. 골인 지점에는 여러 사탕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이 서로 손을 잡고 달려가더니 사탕을 가운데 놓고 모두 둘러앉아 먹는 것이었다. 선생이 물었다. 먼저 도착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자 학생들은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우분투를 배웠다고 답했다.

{요한복음 6:51-58}

51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52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서로 논란을 하며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 하고 말하였다.
5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신학적 관점]

요한복음은 오천 명 급식기적 이야기에 대해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매우 새로운 해석을 던지고 있다. 이는 유대 주류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하면서 나온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신앙고백이다. 로고스(1:1)에 대한 보조 해석이다.

본문이 성찬식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쯔빙글리는 성찬식에 관한 핵심 구절이라고 하는 반면, 말틴 루터는 성찬식에 관한 구절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살’과 ‘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닌 ‘내’에 방점이 있는 곧 일상에서의 먹고 마시는 일의 거룩성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한다.

요한복음은 성찬에 대한 말씀 대신에 세족식을 유언으로 남긴다. 어쩌면 당시 예수공동체의 성찬예식에 대한 지나친 신비적 경향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참조 고전 11:17 이하)

인간은 쉽게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살아간다. 영과 육, 더러운 것과 거룩한 것. 세상과 하늘나라, 순간과 영원, 참과 거짓, 물질은 더러운 것이고 순간적이며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야말로 순수하고 영원하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자신도 모르게 내 편과 상대편을 가르게 되면서 나는 선이고 상대는 악하다고 하는 편견을 갖게 한다.

지금 요한공동체는 주류 유대사회로부터 밀려나 변두리 소수의 무리로 살아가면서 바로 그러한 유혹에 직면해 있었다. 여기서 저자 요한은 예수를 영적인 존재, 곧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적 존재로 여김으로 영적 신비적 세계로 빠져 들어가려는 요한공동체를 향해 ‘그러지 마라. 그 길은 영지주의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위험한 길이요, 스스로를 자멸로 몰아가는 길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다. 우리가 매일 먹고 있는 손으로 만지고 우리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영양분으로 변하고 먹다 상에 떨어뜨리는 그 밥이 예수다라고 하는 매우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성과 속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살을 먹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기억하는 하나의 예전이었다. 그런데 이 살을 먹는다는 의미를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고 서로 따지고 있다는 구절은 곧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얘기이다. 우리는 3장에서 유대사회의 존경받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예수와의 대화 속에서 던진 질문을 알고 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지 않습니까?” 이 또한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일종의 풍자이다.

[주석적 관점]

빵은 유대인들의 주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다.’가 보다 정확한 번역이 되겠다.

[설교적 관점]

어느 날 프란시스가 한 제자에게 “오늘은 저 아시시의 거리로 나가서 설교를 합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돌아보고 또 시장을 돌아다니며 서로의 느낀 점을 나누었다. 날이 저물어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자가 깜짝 놀라 외쳤다. “선생님, 오늘 우리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그 제자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웃으며 말합니다. “형제여, 우리가 시내를 거닐던 모든 시간동안 우리는 설교를 한 것이오. 사람들은 우리를 보았고,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소. 그리고 우리의 얼굴 표정과 행동들을 보았을 것이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설교가 아니겠소.”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 조헌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