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시인들의 4·19
들어가며
12년간의 1인 독재와 억압에 대한 전 국민의 분노, 투쟁 그리고 일주일 후 독재자의 하야. 4・19 이후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국민에 의해 정부 수반이 바뀐 현재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기에 기독교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그 사건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4・19를 전후로 한국의 문학계는 이전과는 다른 사조를 형성한다. 1950년대 문학이 전쟁의 참상과 전후의 세태, 인간의 불안을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그렸다면, 4・19 이후 1960년대 문학은 역사 인식의 변화, 현실 참여와 순수의 논쟁 등 리얼리즘적 시각으로 바뀐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사에서는 4・19를 ‘문학의 혁명’으로 본다. 4・19가 작가 개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19를 소재로 하거나 형상화한 작품은 소설보다 시가 더 많다. 시는 길이가 짧아 접근하기 쉽고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심지어 무명이라고 표기된 사람들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이날을 기록했다. 1960년만 해도 4・19를 기념하는 수십 권의 시집이 발행되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4・19 혁명 희생학생 추도시집 『뿌린 피는 영원히』(한국시인협회, 1960)는 4・19 한 달 뒤에 발행되었다. 1부에는 초등학생, 고교생, 대학생들의 시가, 2부에는 기성 시인의 시가 실려 있다. 『항쟁의 광장』(김용호 편, 1960)은 4월 하순과 5월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혁명 기념시를 모은 것으로 기성 시인과 대학생의 시를 실었다. 『학생혁명시집』(김동녕 외, 1960)은 4・19 혁명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된 시들을 모은 것으로 역시 학생들과 기성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 대부분의 시집에 기성 시인들의 시와 더불어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과 주부의 시까지 실렸다는 데서 4・19가 전 국민의 의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잡지도 특집을 마련하는데, 잡지 「새벽」(1960. 5.)은 네 명 시인의 공동 창작시를 게재하였고, 「사상계」(1960. 6.)는 “민중의 승리 기념호”라는 특집을 마련하였다. 공동 창작이란 한마음이 아니면 작업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4・19에 대한 마음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시인들은 자신이 지닌 기존의 경향과는 다르게 4・19를 형상화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당대 지배세력을 비판하고, 1인 독재와 부패한 정치인을 저주하였으며, 시위대에 총기를 난사하여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한 위정자의 폭력을 고발한다. 둘째, 당일의 치열함과 전쟁과 같은 생생한 현장 묘사, 어린 학생부터 온 국민이 함께한 혁명 참가자들의 용감함과 기개와 열정을 보여주며, 역사의 주체가 되는 민중의 정신을 찬양한다. 셋째, 자유와 정의를 외치다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희생을 애도한다. 넷째, 4・19의 의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혁명의 순수성과 혁명에 대한 감격을 형상화한다. 기독교 시인들의 4・19 시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기독교 시인들의 4·19
박두진(1916-98)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은 옳다고 보는 시인이었다. 그는 1960년에 일어난 3・15 마산사건 직후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다가 일어난 것이 마산사건이었다. 그러한 불안한 예감과 피비린내를 풍기는 살벌하고 무거운 공포와 암흑의 분위기 속에… 우리는 우중(愚衆)의 나라가 아니다.”(“우리는 우중의 나라인가”, 1960)라며 정권이 이렇게 하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는 예언과 더불어 민중은 미련한 백성이 아님을 말한다. 그리고 4・19 직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쓴다.
우리는 아직도 /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 이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 우리는 아직도 / 우리들의 절규를 멈춘 것이 아니다. / 그렇다. 그 피불로 외쳐뿜는 /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이여! /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 / 불의 노도, 불의 태풍, 혁명에의 전진이여! / 우리들 아직도 / 스스로는 못 막는 / 우리들의 피대열을 흩을 수가 없다. / 혁명에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 (중략) 우리들이 이루려는 민주공화국. 절대공화국 // 철저한 민주정체, / 철저한 사상의 자유, / 철저한 경제균등, / 철저한 인간평등의, // 우리들의 목표는 조국의 승리, / 우리들의 목표는 지상에서의 승리, / 우리들의 목표는 / 정의, 인도, 자유, 평등, 인간애의 승리인, / 인민들의 승리인, / 우리들의 혁명을 전취(戰取)할 때까지, // 우리는 아직 / 우리들의 피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 우리들의 피불길, / 우리들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 혁명이여!
- 박두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사상계」, 1960. 6.)
위의 시는 너와 나, 학생과 모든 시민들, 즉 ‘우리’가 함께한 4・19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 인간애, 인민들의 승리인 혁명이라고 말한다. 자료를 살펴본 결과 다른 시인들은 4・19를 혁명이라고 표현하지 않지만, 박두진은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의거에서 혁명이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박두진은 4・19의 의의와 본질을 초기에 파악한 것이다. 대열 앞에 참여한 그에게 군중들의 대열은 불의 노도, 피대열, 전진이다. 그들은 피를 뿜는 절규와 외침으로 민주주의, 사상의 자유, 공평한 경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한다. 여기에 ‘철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흐지부지하게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한 어조로 철저하게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박두진에게 4・19는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이었다. 개혁의 의지와 열의는 여기에 멈추어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야 한다. 투쟁의 깃발을 내려서는 안 되고 민주화를 위한 전진을 멈추어서도 안 된다. 4・19의 정수와 역사적 의미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는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가진 그였기에 다른 시인들이 4・19 이후 변하지 않는 사회에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박두진은 좌절하지 않는다. 대신 4・19의 정신으로 싸웠다. 5・16 이후에는 유신을 반대하였고 투옥되기도 한다. 감옥생활 중 항상 성경책을 들고 다녀서 간수들 사이에서 ‘성경책’으로 불렸다고 한다. 김지하의 <오적> 판결 시에도 당당하게 김지하 시인의 잘못이 없음을 말하였고, 1974년에는 이런저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해직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은 비슷한 상황에서 다시 읽힌다. 자신의 시처럼 살았던 박두진이기에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는 1980년대 학생운동이 사회변혁을 향해 치달릴 때 투쟁의 현장에서 다시 낭독되었고, 대학교 교지에 지속적으로 실린다. 그래서 그의 시와 혁명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박목월(1916-78)은 당시 지배자의 통치와 억압을 비판하고, 4・19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 말한다.
(전략) 불의로써 백성을 / 다스리지 못하며 / 억압으로 백성을 / 짓밟지 못하며 / 권력으로 백성의 어진 마음을 / 송두리째 빼앗지 못하는 / 이것은 / 하늘이 마련한 길. / 이 창창하고 / 넓은 길을 벗어나 / 누가 감히 / 백성의 우두머리라 하리요. (중략) 우리 다시 / 민주대한의 터를 마련하게 되면 / 그때는 / 아예 / 속이지 말고, 속지 말고 / 억누르지 말고 눌리지 않고 / 업수 여기지 말고, 업수 여김을 / 당하지 말고 / 남을 힐난하지 말고 / 허물을 뜯지 말고 / 이웃은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고 / 돕고 / 남의 말을 소중히 여기고 / 권력을 탐내지 말고, / 휘두르지 말고, / 어리석은 시인의 꿈처럼 / 황홀한 / 그 나라를 마련하자.(후략)
- 박목월, <동이 트는 순간을>(「조선일보」, 1960. 4. 26.)
위정자들은 불의로 백성을 다스렸고, 억압으로 짓밟았으며, 권력으로 어진 백성의 마음을 빼앗았다. 우두머리는 백성을 속였고 억눌렀으며 업신여겼다. 정권을 잡은 자는 서로 힐난하고 허물을 들추었다. 창창하고 넓은 하늘의 뜻을 모르는 이는 감히 백성의 우두머리라 할 수 없다. 이들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뜻을 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혁명은 하늘의 뜻이다. 이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는 속이지 말고 억누르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고 힐난하지 말고 허물을 뜯지 말고, 사랑하고 돕고 남의 말을 소중히 여기자고 한다. 그리고 권력자는 권력을 탐내지 않고 휘두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혁명의 인식은 기독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위 시가 혁명 당시의 소용돌이를 묘사한다면, 다음은 이승만의 하야 성명 후에 발표한 시이다. 감정이 정리되어 있지만, 혁명 후 변하지 않는 사회를 예견하듯 민주주의의 승리라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학우들이 메고 가는 / 들 것 위에서 / 저처럼 윤이 나고 부드러운 머리털이 / 어찌 주검이 되었을까? / 우람한 정신이여. / 자유를 불러올 정의의 폭풍이여. / 눈부신 젊은 힘의 / 해일이여. (중략) 참된 뜻만이 / 죽은 자에서 산 자로 / 핏줄에 스며 이어가듯이, / 그리고, 4・19의 / 그 장엄한 업적도 /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빛나는 눈짓으로 / 우리 겨레면 누구나 숨쉴, / 숨결의 자유로움으로, / 온 몸 구석구석에서 속삭이는 / 정신의 속삭임으로 / 진실로 한결 환해질 / 자라나는 어린 것들의 눈동자의 광채로 / 이어 흘러서 끊어질 날이 없으리라.
- 박목월,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분들을 위하여>(1960. 6.)
시위 참여자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와 분노보다는 부모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죽어간 이들의 윤이 나고 부드러운 머리털, 참된 뜻, 태극기의 빛나는 눈짓, 숨결의 자유로움, 정신의 속삭임과 같은 단어에 그 전의 시들에서 보이던 격렬함이 정제되어 있다. 혁명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한 거리를 보고 ‘지나간 것은 조용해지는 것이며 그것은 역사의 너그럽고 엄숙한 표정’으로 해석하는데, 이 ‘너그러움’이라는 단어는 박목월 시의 경향을 반영한다. 박목월은 기독교를 소재로 한 시에서 기독교와 신을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품성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으며, 숨 쉬는 자유로움과 참된 뜻만이 영원하며, 산 자의 핏줄에 스며서, 어린것들의 눈동자의 광채에 이어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독교적 인식을 보여준다.
이어, 황금찬(1918-2017)의 시는 숨져간 영혼들을 위로하는 위령제에서 쓴 추모시로서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그들을 그리워하며, 죽음과 희생을 이어 우리가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황금찬이 주목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과 주장보다는 죄 없는 그들, 공책 한 권 제대로 사서 쓰지 못한, 더운밥 한 끼 먹어보지 못한 가련한 그들이다.
가난한 나라에 나서 가난하게 큰 / 그리고 죄 없는 그대들이 아닌가 / 언제 더운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어봤으며 공책 한 권을 제대로 사 썼던가 / 그대들은 그렇게 살아온 가련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누가 그대들을 저렇게 몰아갔단 말인가 / 아! 말하라 하늘이여 땅이여, 이 사실을 증언하라 // (중략) 장부(丈夫)는 죽음이 두려워 못하던 역사(役事)를 / 그대들은 죽음으로써 행동했다.(하략)
- 황금찬, <학도 위령제에 부쳐>
위 시는 ‘가난한 그들을 왜 죽였는가’라고 총을 든 이들을 향해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듯이 질문한다. 가련한 그들과 장부를 대비하여 장부가 하지 못한 일을 그들은 이루었다며 장부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리고 홍수 같은 4월의 정신은 강물이 되어 흘러 삼천 만의 눈동자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박화목(1924-2005)은 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이다. 평양신학 예과와 만주 봉천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8세에 동시를 시작하였다. 4・19 당해에 나온 시는 할 말이 많았고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호흡이 길고, 그 길이도 장편에 가깝다. 그러나 다음 시는 다른 시에 비해 동요와 같이 짧으며, 감정적이기보다는 차분하게 4・19를 봄의 의미와 상징적으로 대비한다.
4월은 / 거칠은 계절풍이 부는 가운데도 / 굳은 땅을 뚫고 짓누른 돌을 밀쳐 제치며 / 어린 푸른 싹이 솟구치는 달이다. // 사월은 / 정녕 생명의 외침을 / 아무도 막아내지 못하는 달이다. // 사람 위에 사람 없고 / 사람 아래 사람 없고… // 그 누가 착하고 어진 우리를 억누르고 / 한 몸의 영화를 그 속절없는 부귀를 누리려고 했던가? / 썩은 권력은 언제든 허물어지고 마는 것을… // 한 겨우내 죽은 듯 / 침묵 속에서 살아온 뭇 생명들 / 이제 활활이 분화처럼 솟구치나니 / 아 진정 / 4월은 부활의 달.
- 박화목, <4월> (「동아일보」, 1960. 4. 26.)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저들은 속절없는 부귀를 누리기 위해 착하고 어진 민중을 억눌렀다. 썩은 권력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진리이다. 4・19는 겨울과 같은 날을 침묵 속에서 보내던 생명들이 봄을 맞아 부활한 것이다. 어리고 푸른 싹이 거친 바람을 이겨내고 굳은 땅과 짓누른 돌도 밀쳐내듯 어린 학생들이 겨울 같은 불모(不毛)의 정권을 거부하였다. 이 같은 인식은 1980년대 저항의 시기에 겨울과 봄, 그리스도의 부활과 민중의 부활이라는 민중시의 계보를 이루게 된다.
김요섭(1927-97)은 동화・동요 작가로서 환상동화를 개척한 ‘한국의 안데르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어린 학생들이 대열에 함께하였고, 시를 통해 당시 상황과 자신들의 감정을 보여주었다. 아래의 시는 1960년 당시 33세였던 김요섭이 이러한 어린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쓴 시인 듯하다.
무차별 사격 / 커다란 집이 불을 뿜고 / 그러나 군중들이 몰려다닌 / 낮에는 /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 태양이 데모대들을 비췄기 때문일까요 / (중략) 그것은 나도 / 참을 때는 바위 / 터질 때는 화산 / 군중의 일부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중략) 아니 누가 묶어 놓은 것은 아닙니다. / 군중은 같은 뿌리를 / 우리 국토에다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 뿌리의 이름은 민주주의.
- 김요섭, <군중–4・19 의거에 지은 시>
시의 화자 ‘나’는 “~일까요?”와 같이 아이가 질문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어린 화자 ‘나’는 데모대와 같이 몰려다닐 때는 무섭지 않았으나,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잠을 잘 때는 무서웠다고 말한다. 본디 부모와 같이 있으면 아이는 무서워하지 않는데 왜 그랬을까? 그리고 시에서 말하듯 군중은 참을 때는 바위와 같지만 터질 때는 화산과 같다. ‘나’에게도 데모대와 같은 외침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무섭지 않았으며, ‘나’ 또한 데모대에 참가하였다.
어린아이가 혁명의 의의를 알아서 참가하였을까? 그것은 모든 군중과 같이 어린 화자 안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소원이 무의식적으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중은 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도 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군중의 일부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어린이들의 참가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김요섭은 동화 작가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세계와 행동에 관심이 있었으며, 당시 아이들의 참여를 이렇게 시로 형상화하였다. 이것은 의미 있는 시선이었다.
김현승(1913-75)은 식민지 시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기도 하였지만, 1960년에는 4・19에 대한 시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사회에 대한 문제보다는 자신의 고독과 신과의 문제에 깊이 침잠한다. 이러한 김현승의 다음 시는 4・19 이후 1년 뒤, 5・16 직후에 쓰
였다.
모든 시내 모든 강물 위에 흘러가는 그 소리와 / 모든 골짜기 모든 산비탈에 울려 가는 그 노래와 / 동서로 가는 남북으로 뻗은 모든 길 위에는 통하는 / 이 우리들의 제목을 위하여… / (중략) 미소하는 눈짓과 / 우리네 하늘에 자유로이 나는 /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우짖음과 / 먼 산등에까지 울리는 그리운 공명의 메아리를 위하여… / (중략) 해마다 피어나는 핏빛 진달래-그네들의 부활과 / 그네를 지키는 천국의 영원한 그네의 조국을 위하여.(후략)
- 김현승, <우리는 일어섰다>(「자유문학」, 1961. 6.)
위의 시에서 김현승의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경향을 볼 수 있다. 1년간 그는 잠잠히 4・19를 보았던 것 같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쓴 시라기보다는 「자유문학」이 4・19 특집을 마련하고 싶어도 과도정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고, 5・16의 추이를 바라보는 가운데 투고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화되어 차분한 느낌을 준다. 강물이 되어 힘찬 소리로 밀려가는 민중의 외침이 아니라 강물 위에 흘러가는 소리로 산을 부수고 바위를 부수는 절규가 아니라 골짜기와 산비탈에 울려가는 노래로 표현한 점과 ‘피불’, ‘핏물’, ‘죽음’ 같은 단어보다 ‘핏빛 진달래’를, ‘함성’보다는 ‘메아리’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 점에서 다른 시인의 4・19 초기 시에서는 볼 수 없는 차분함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4・19에 대한 거리감과 4・19 이후 좌절된 혁명의 분위기, 그리고 순수와 참여의 선택에 선 시인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 나오며
지금까지 4・19를 소재로 한 기독교 시인들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기독교 시인들과 비기독교 시인들은 4・19에 대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의 소재나 제재가 비슷하다. 그러나 각기 자신의 시 세계를 반영한다. 기독교 시인들은 자신들의 기독교 소재 시, 시 창작의 자세, 신관으로 4・19를 형상화하였다. 박두진의 기독교 시는 치열하고, 박목월은 온화하고, 김현승은 사색적이다. 황금찬은 시 창작 초반에 가난한 아이를 시의 대상으로 하였다. 4・19를 소재로 한 시도 박두진은 치열한 저항을, 박목월은 역사의 너그러움을, 김현승은 사색적인 시점을 보이며, 박화목은 부활에, 김요섭은 아이의 시점에, 황금찬은 가난함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죽어서 영원히 산다.’라는 성서의 교훈, 다시 말해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기독교적 사유를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의 의미는 이후 저항시와 민중시의 저변에 흐르는 인식, 즉 투사들의 죽음이 새로운 세계를 가져올 것이라는 세계관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이후 4・19 기념식 등 1980년대 중반까지 시인들은 4・19 기념시를 쓰지만, 유신정권 시대에는 5・16에 묻혀서, 또 1980년대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주목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4・19를 소재로 한 시들의 의의는 ‘기억’에 있다. 아무리 결렬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신화나 상징이 되거나 잊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4・19 직후에 쓰인 시들은 당시 상황과 정신, 그날의 함성, 절규, 감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시들이 있기에 당시의 정황과 의의를 변하지 않는 순수함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