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잠하라, 고요하라!” - 큰 광풍, 큰 고요
* 말씀: 마가복음 4장 39절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에 큰 광풍이 일어났다.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왔다.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어부들조차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 뒤편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풍랑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나를 돌보지 않으신다는 실존적 불안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무관심으로, 그분의 잠을 무능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과 같은 배 안에 계셨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1. 생명을 위협하는 바람을 꾸짖으시다
예수님은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셨다”(에피티마오). 예수님이 귀신과 악한 세력을 제압하실 때 사용된 강력한 단어다. 예수님의 꾸짖음에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다. 악한 영을 꾸짖어 억눌린 사람을 해방하시고(막 1:25), 열병을 꾸짖어 무너진 일상을 회복시키셨다(눅 4:39).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막 8:33)와 보복을 정당화하는 제자들의 생각도 꾸짖으셨다(눅 9:55).
그분은 상처 입은 사람을 꾸짖지 않으시고, 사람을 억압하는 세력과 생명을 왜곡하는 생각을 꾸짖으셨다. 바람을 향한 명령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생명을 삼키는 혼돈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명령이었다.
2. 사랑은 때로 단호하게 저항한다
모든 분노가 악한 것은 아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폭력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무책임한 방관일 수 있다. 사랑은 상처 입은 사람을 품지만, 그 사람을 짓밟는 세력에는 단호하게 “그만하라”고 외친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파괴하려는 분노가 아니라 살리려는 권위였다. 그것은 생명을 위한 거룩한 저항이었다.
오늘도 사람을 삼키려는 바람이 분다. 전쟁과 혐오, 탐욕과 불의, 차별과 중독, 거짓과 절망이라는 시대의 광풍이다. 예수님의 평화는 악을 모른 체하는 고요가 아니다. 생명을 짓밟는 세력에 맞서 사랑으로 저항하는 역동적인 샬롬이다.
3. 큰 광풍을 큰 고요로 바꾸시다
예수님의 한마디에 큰 광풍은 큰 고요로 바뀌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에는 다른 큰 두려움이 일어났다. 이제 그들이 두려워한 대상은 풍랑이 아니라,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시키는 예수님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믿음은 풍랑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값싼 낙관주의가 아니다.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이 파도보다 크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평안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풍랑을 멀리서 꾸짖지 않으셨다. 친히 그 혼돈의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드셨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 사망 권세에 영원한 침묵을 명령하셨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오늘 우리의 배도 흔들린다. 그러나 풍랑은 배를 흔들 수 있어도 배 안에 계신 예수님까지 삼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두려움에 끌려가는 노예가 아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에 맞서 사랑으로 저항하는 제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처 입은 이에게는 온전한 위로요, 생명을 짓밟는 어둠의 세력에게는 거룩한 경고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 기도문
생명의 하나님,
흔들리는 배 안에서 주님의 임재를 보게 하소서.
두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삼키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의 분노가 파괴적인 미움이 아니라,
살려내는 사랑의 용기가 되게 하소서.
십자가와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우리 삶과 공동체 안에서 참된 고요와 샬롬을 이루게 하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