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10월 6일(세계성찬주일) 설교 자료 참고『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ree610 2024. 10. 1. 11:50

10월 6일(세계성찬주일) 설교 자료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글쓴이: 조헌정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지구민주주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지구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동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한다. (반다나 시비)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욥 1:1; 2:1-10; 시 26; 히 1:14-; 2:5-12; 막 10:2-16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욥 1:1; 2:1-10}

1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1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님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과 함께 주님 앞에 섰다.
2 주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 하고 물으셨다. 사탄은 주께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
4 사탄이 주께 아뢰었다.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립니다.
5 이제라도 주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는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말 것입니다!"
6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를 너에게 맡겨 보겠다. 그러나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아라!"
7 사탄은 주 앞에서 물러나 곧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까지 악성 종기가 나서 고생하게 하였다.
8 그래서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
9 그러자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10 그러나 욥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이렇게 하여,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신학적 관점]

의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욥기는 소위 배웠다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의 꾸며진 각색(脚色)이다. 욥은 완전(完全)에 가까운 상징으로서의 인간이다. 신학적으로는 비록 의인에게 고난이 임하는 곧 인간의 관점에서 악(사탄)의 존재성을 인정하든가 아니면 죄인 규정을 해야 하는 모순이 존재하더라도 이는 신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시험에 불과하다는 신정론(신정론(神正論), theodocy)을 설파한다.

[목회적 관점]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하는 일이 모두 잘 되는 어떤 신앙인이 갑자기 삶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모두 그에게 분명히 어떤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인과응보 사상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소문들이 돌아다닌다. 목회자 또한 때때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침묵으로 견뎌내야 하는 고난을 겪는다. 욥기는 판단 유보를 요구한다.

[주석적 관점]

1:6-22(1막)과 2:1-10(2막)은 같은 구문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땅과 하늘의 장면을 번갈아 가며 연출하고 있다. 1:1-5(땅); 1:6-12(하늘); 1:13-22(땅); 2:1-7a(하늘); 2:7b-10(땅)

“ha-satan” 정관사가 있음으로 이는 악의 상징이 아니라 하늘 궁정 회원으로 마치 (하늘)법정의 검사와 같다.

[설교적 관점]

욥의 부인에게 있어 종교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편이다. 곧 실용 종교(utilitarian religion)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신앙인은 이와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이기적이다. 그러나 성서는 계속해서 바른 신앙은 이타적이어야 함을 설파한다.

인간의 고(苦)는 종교의 기원이 된다. 우리는 신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 묘사한다. 생사화복은 나 중심의 이기적 언어이다. 욥기는 내가 당하는 고난이나 생사화복은 하느님의 뜻과는 연관이 없으며 신앙과도 별 관련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모세는 신명기 30장에서 복과 저주의 길에 대해 얘기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부탁한다. 물론 욥은 전보다 배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줄곧 친구들과의 대화와 논쟁을 통해 인생은 인과응보(因果應報) 형태의 도식적인 결과에 달려 있지 않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믿음의 보상은 무엇인가? 아니 그러한 기대는 성서적으로 바른 생각인가?

오늘날 지구 생태학적 관점은 인간중심의 서구(신/인격)신학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고 있다.

{시편 26}

1 야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 주소서. 깨끗하게 살며 당신만을 철석같이 믿었사옵니다.
2 야훼여, 샅샅이 캐어 보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 보소서.
3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4 사기꾼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흉한 자들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5 악인들의 모임에는 끼이지도 않았고 나쁜 자들과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6 야훼여, 손을 씻고 죄없는 몸으로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7 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고마우심 노래로 찬미하리이다.
8 야훼여, 나는 당신께서 사시는 집이 좋사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들이는 곳이 좋사옵니다.
9 이 목숨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이 생명을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은 뇌물만 집어 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입니다.
11 이 몸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사오니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소서.
12 든든한 자리에 세워 주신 일 감사드리며 예배하는 모임에서 야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히브리서 1:1-4; 2:5-12}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3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게 되셨으니,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신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성경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7 주님께서는 그를 잠시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존귀로써 그에게 관을 씌우셨으며,
8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9 예수께서 다만 잠시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 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10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근원에서 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12 그리하여 그는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신학적 관점]

히브리서 저자는 땅의 ‘예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고, 하늘의 ‘그리스도’에만 관심하고 있다. 곧 하느님의 인간 구원사에 있어 제1성서의 모든 역사와 계시를 뛰어넘는 유일무이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 또한 인류 구원을 위한 영광스런 면류관으로 승화혹은 미화된다. 니케아신조나 사도신조와 같이 교리 중심의 신앙고백문이다.

[목회적 관점]

목회는 교인들의 삶에 직결되는 땅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땅의 문제를 땅의 방식으로 풀지 않고 하늘의 방식으로 풀고자 한다. 그런데 땅의 논리적 방식과 하늘의 비논리적 방식에는 큰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 간격을 좁히는 일이 목회라고 말할 수 있다.

[주석적 관점]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 고전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문학 기법인 곧 단어의 첫 자음이 같은 자음으로 계속되는 두운(頭韻)법 (alliteration)과 같은 모음 주로 o와 같은 긴 모음으로 끝나는 각운(脚韻)법(assonance) 그리고 이를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약간의 변형된 형태의 병렬적 문장으로 연결하는 기법(chiastical)에 익숙하다. (Feasting 135) 본래 서신서는 청중 앞에 읽는 글이었음을 상상하면 쉽다. 예를 들면 이는 판소리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3절 ‘본보기(hypostasis)’는 이후 초기 교회사에서 진행되는 삼위일체 논쟁의 핵심 단어이다. 본래는 예배 때 그리스도 찬양을 위한 시적 언어였다.

[설교적 관점]

구원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고통에 근거하고 있다는 가르침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설사 이해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이는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상정(想定)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지셨다는 구원 교리가 등장한다. 이는 복음서의 예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저자는 예수를 하느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독생자 아들로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 또한 같은 하느님이라는 같은 근원에서 왔음을 언급하면서 예수가 우리를 형제자매로 부른 일로 이러한 모순을 논리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땅에 발을 붙이고 여러 문제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설교자는 땅의 문제를 하늘의 해답으로 쉽게 해결을 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가능하면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며 질문과 답이 함께 열려 있는 형태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어떠할까? 본문의 기조는 예배를 통한 찬양과 고백이었음을 기억하자.

{마가복음 10:2-16}

2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4 그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면,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남녀 결혼과 이혼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어린아이의 관계라는 세 주제를 갖고 있다. 물론 이는 가정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속해있지만, 신학적으로 이 세 주제를 하나로 엮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출발이 바리새인들의 함정이었음을 파악할 때, 상황적으로는 하나의 끈으로 쉽게 연결이 된다.

[목회적 관점]

남자와 여자를 출산을 전제로 하는 성적 개념의 전통적인 이해와 삶의 동반자의 관점에서 젠더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출산을 전제하는 성적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부부로 귀결된다. 교인들은 출산의 경험이 없는 목사에게 결혼 주례를 부탁하는 것을 주저한다.

* 이혼을 무조건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죄로 규정하는 일은 현대사회에서 타당한 일인가?

[주석적 관점]

사도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언급하는데, 제각각 상황에 따라 약간의 해석이 차이가 존재한다. (참조 고전 7장; 마 5:32; 19:9; 눅 16:18; 엡 5:22-33)

[설교적 관점]

모세 시대의 이혼증서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보호장치였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이혼증서가 있는 여성은 재혼을 보다 용이(떳떳)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 시대에는 마치 유교권 사회에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칠거지악과 같이 이를 악용하고 있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고 있다. 청중 안에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부부도 있고, 이혼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성서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과제와 직접 연관이 된다. 축자영감설 혹은 문자적 성서 이해를 하는 설교자에게는 큰 걸림돌이 된다.

어린아이와 하느님 나라의 관계는 순진성보다는 개방성(열린 마음)으로 연결하는 것이 옳다. 5절의 (어른들의) ‘완악한(굳은) 마음’에 대비된다. 이는 저자 마가가 서로 다른 주제를 하나의 본문(pericope)으로 만든 (숨은) 의도라고 생각된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