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14:1~19 방언의 한계와 예언의 유익.
찬송가 217장 하나님이 말씀 하시길
Ⅰ. 방언보다 예언할 것을 권면함 (고전 14:1-5)
1. 사랑에 대한 권면(1) 모든 은혜 중 가장 중요한 이것만은 놓치지 말라고 권고한다.
2. 어떤 은사를 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1)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은사는 은혜와 사랑 다음으로 추구해야 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3. 이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2-5) 사도 바울은 여기서 예언과 방언만을 비교한다. 방언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떠들썩하고 자극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추구하는 데는 별로 적당하지 못한다. 방언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과 둘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2절).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덕을 세우지 못한다. 그러나 예언의 말은 듣는 사람에게 유익하다. 이 예언으로 그들은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는다(3절).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덕만을 세운다(4절). 다른 사람들은 방언을 듣고 유익을 얻지 못한다. 교회에서 담화하는 목적은 덕을 세우는 일이며(4절), 예언은 이것을 감당한다. 이것을 가장 훌륭히 해내는 것이 가장 좋은 은사이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가장 유용한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자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방언을 하는 사람보다, 교회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더욱 유용하고 가치가 있다.
Ⅱ. 해석이 없는 방언 (고전 14:6-14)
[1]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꽹과리 소리나 거문고 소리와 별로 다른 것이 없다. 구멍이 하나만 뚫린 피리나 줄이 하나 뿐인 바이올린의 연주에 맞추어서 춤을 출 수가 없듯이 방언도 사람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7절).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는 나팔에 비유하기도 한다. 진격 나팔 소리 대신 퇴각 나팔 소리가 나거나 무슨 소리인지 불분명한 소리가 나면 누가 출정 준비를 하겠는가 의미가 없는 언어는 사람에게 아무런 교훈이나 사랑을 전하지 못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또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야만인의 횡설수설로 비유한다. 세상에는 많은 언어가 있지만 그 말에 뜻이 없는 언어는 없다. 누가 하는 어떤 말이 말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의미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횡설수설이 된다. 이런 경우에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야만인이 된다(11절). 그들은 의미 없이 단지 소리만 교환할 뿐이다.
[2] 교회에서 덕을 세울 수 있는 은사를 사모하라고 바울은 권고한다(12절). "사람의 영혼에 가장 최고로 봉사할 수 있는 은사를 사모하라." 또 외국어로 방언을 하거든 그것을 통역할 수 있는 은사를 주도록 하나님께 구하라(13절). 교회에 덕을 세우려면 그 방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즉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교회에서 얻는 신앙 체험에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여 유익을 얻도록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강력히 권면한다.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14절). 사람이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의 헌신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이해하기 쉽고 뜻이 분명한 언어가 신앙활동에 가장 적절하다.
Ⅲ. 지혜에 장성한 사람 (고전 14:15-19)
[1] 사도 바울은 공중 기도와 찬양의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친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이 이해 할 수 있는 기도와 찬양을 하라고 말한다. 공중 예배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행해져야 한다.
[2] 바울은 이것에 대한 몇 가지 이유들을 밝힌다.
1) 그렇지 않으면 무시한 사람들은 기도나 감사에 "아멘"하고 회답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다(16절). 모든 사람들은 속으로 "아멘"하여야 한다. 또 공중 기도를 할 때에 내적으로 동의하여서 "아멘"하고 소리를 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무슨 내용을 기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어떻게 아멘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공중예배의 일치성은 완전히 허물어질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며, 할 수도 없을 것이다(17절).
2) 바울은 자기를 본보기로 제시하여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①바울은 신령한 은사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또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귀중히 생각하고 자랑하는 것을 바울이 과소 평가한 것은 시기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있어서도 그들 누구보다도 우월했다. 바울이 그들을 시기하기보다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사역자인 바울을 시기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합리함을 책망할 때는, 그 책망이 그들의 어떤 소유나 혹은 어떤 업적에 대한 시기와 불평이 아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
②바울은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고 말한다. 참다운 목회자는 자신에게 칭찬과 인가가 돌아오는 것보다 사람의 영혼에게 다소라도 유익을 끼치는 것을 더 귀중히 여긴다.
**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게 주시는 은혜와 교훈과 축복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방언보다 예언하라
* 은사의 효용성(14:1-5)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씀은 성령의 은사를 구하려는 성도들의 내적인 의도의 순수성을 촉구하는 권면입니다. 은사의 효용성은 과연 그 은사가 사랑을 따라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사랑과 유리되면, 이미 그 은사는 주신 바 목적에서 이탈되고 맙니다.
또한 은사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사모하거나 활용하는 사람들은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사랑이 충만한 기초 위에서 열매맺어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는 개인적인 유익에 그치는 반면, 예언의 은사는 교회 전체에 유익을 가져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한 유익’입니다. 즉 개인적인 덕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전체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일이 우선되고 더 가치 있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은사를 나의 자랑으로 삼지않게 하시고 교회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한 마디를 하게 하옵소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