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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서강대에서 열린 『헨델 극장』 첫 북콘서트 서울 서강대 정하상관 311호에서 6-8월 『헨델 극장』의 첫 북콘서트가 있었다. 평화

ree610 2026. 6. 21. 13:12

'질문' -서강대에서 열린 『헨델 극장』 첫 북콘서트

1. 서울 서강대 정하상관 311호에서 6-8월 『헨델 극장』의 첫 북콘서트가 있었습니다. 15명만 모이면 성공이라 생각하고 갔는데 곱절은 더 오셨습니다. 기대할 수 없는 분들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뭔 정신으로 북콘서트를 마쳤는지 모릅니다. 글쟁이로 저를 데뷔시켜 준 월간 <복음과상황> 전 편집장 서재석 형, 독자로 처음 이름을 알게 된 전 MBC 피디 이채훈 선생, 이호철북콘서트홀 LBCH 표문송 관장, 배화여자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김경옥 교수, 강릉꽃놀이패 홍순관 가수, 김지은 목사, 지에스씨개발엔지니어링 윤수호 소장, 절친 기진호 선생, 박현진 대표, 정용 교수, 윤성아 방송 작가, 권오재 청와대 행정관, 정수진 선생, 페친 박노임 님, 그리고 이름을 모르거나 들었는데 적어 두지를 못해 기억 못하는 분들(죄송합니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2.
이야기 손님으로 자리를 빛내 주신 김기석 목사께는 달리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눈 밝은 독자들은 저보다 김기석 목사를 더 잘 아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평전』 에 이어 이번에도 감동적인 추천사를 써 주시고 『헨델 극장』 첫 북콘서트 이야기 손님까지 응해 주셨습니다.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는 제가 음악 글을 쓰는 작가 중에 가장 코드가 맞는 분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윤수 교수 음악 글을 제일 좋아한다는 말을 주위 분들에게 했습니다. 그런 두 분을 한 자리에 모실 수 있어서 한 문장, 한 단어라도 제 말을 덜어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두 분이 더 이야기를 하시도록 만들고 싶었거든요.  

3.
발제 중에 저는 나치에 부역했던 카라얀, 카를 뵘, 작곡가 칼 오르프, 피아니스트 발터 기제킹, 친일 부역자 작곡가 채동선, 테너 이동범 등등을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들 음악을 안 듣는다는 것 때문에 편협한 인간이란 비난을 받더라도 내 기품을 지키기 위해 그런 결정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런 작곡가나 연주자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언론이나 음악계가 밀어주는 유명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숨어 있는 연주자가 많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을 제하고도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윤수 교수로부터 정명훈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북콘서트가 끝나고 식당으로 옮기면서 저 질문을 왜 하셨는지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이런 질문을 주셨습니다. "만약 나치 부역 혐의가 있었으나 사실상 면죄부를 받은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어떤 출판사에서 평전 의뢰를 하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말입니다.

4.
이 질문은 중요하다 싶어 뒷풀이를 끝내고 들어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거리에서 충분한 답을 드릴 수 없었지만, 제게 그런 요청이 들어온다면 당연 응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글은 왜 그런 결론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 설명입니다.  

5.
"음악보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이 아름다워야 음악도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은 음악만 아름다우면, 잘 팔리는 음악이면 거의 모두가 열광했다.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제 삶은 음악만 좋으면 친일을 했든 나치 전범이든 묻고 따지지 않고 열광하는 이들에게 받은 상처가 깊었다. 그런 작곡가나 연주자가 여전히 존경을 받는 예술계가 싫었다."

오늘 제 발제안 도입부입니다. 만약 오늘 발제를 1-2분 내로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두 다 버리고 방금 인용한 부분만 이야기하고 내려왔을 겁니다. 평생 사람보다 더 대접을 받는 음악, 잘 팔리고 유명하면 나치 독재와 친일 부역까지 문제 삼지 않는 음악계 주류와 그들을 추종하는 클래식 마니아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헨델 극장』을 이렇게 썼거든요.  

6.
제가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 또는 채동선 평전 부탁에 응할 것이라 답할 수 있는 것은 사적 영역과 공적 대응은 달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적 공간에서 카라얀이나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듣지 않는 것은 자유이지만 공적 영역에서 그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 그걸 위해 그의 음악을 듣는 건 음악도로서 '의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사실 사적 영역에서도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무 자르듯 자유와 의무 영역이 홍해처럼 쫙 갈라지지 않더군요. 나치와 친일 부역자라도 그가 지휘자라면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와 협연한 성악가나 기악 연주자가 엄연히 있는데 그 지휘자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들 연주를 포기할 수는 없더군요. 그리고 음악을 듣다 보면 내 머리는 안 들어야 한다고 명령하지만 몸이 말을 안 듣고 계속 그 음악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가 더러 더러 있습니다. 내 부정적 기준과 취향을 저격하며 어떤 음악이 밀려 들어오는 그 순간에도 이 사람은 나치나 친일 부역자기 때문에 칼 같이 음악을 꺼 버린다? 에이, 그런 짓은 못합니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서는 점점 더 그런 순결주의에 몸이 저항합니다. 내 의식과 논리적 일관성도 중요하지만 점점 더 논리나 머리보다는 몸의 요구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 문제 앞에서도 흑백 논리에 몸을 맡기거나 의지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는 타협적이랄까, 그게 아니라면 애매합니다. 그러고 있는 게 부끄럽거나 잘못하고 있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8.
이제 결론을 쓸 시간입니다. 제가 음악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할 때, 사람이 아름다워야 음악이 아름답다고 할 때의 의미는 결정적 실수와 약점 없이 평생을 모범적으로 살아낸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흠결 없이 매사에 모범적으로 산 사람을 폄훼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존경합니다. 그러나 재미 없고 숨이 막힐 것 같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음악보다 먼저이고, 사람이 아름다워야 음악이 아름답다는 이야기의 핵심은 무결점에 방점이 찍히지 않습니다. 결정적 실수나 잘못이 있더라도 문제의 핵심은 그걸 반성하고 사과하며 돌이켰느냐 아니냐의 여부입니다. 제겐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나치에 부역했고, 악덕 친일 행위자라도 그가 진정한 사과를 했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낸 게 확실하다면 그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변호하고 옹호할 것입니다. 『헨델 극장』의 서문에 몇 줄 적지는 못했지만 온 몸을 실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민족이나 국가의 위기 앞에서 침묵하거나 부역 했던 예술가의 일그러진 삶과 그가 남긴 눈부신 작품을 끌어안고 불편한 동거를 이어왔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친일과 독재 부역은 안타깝지만,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사실은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타협했습니다. 문학비평가 김진석이 서정주의 시가 지닌 그 ‘지독한 아름다움’이 사실은 역사적 책임과 타인의 고통을 지워 버리는 교묘한 세척제였음을 고발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렇게 모호했습니다.

사람보다 문학과 예술에 우선권을 내주었습니다. 삶에 뿌리내리지 못한 예술의 아름다움에 너무 오래 현혹되거나 기만당했습니다.

헨델은 달랐습니다. 미당이 삶을 버린 대가로 명성을 꿰찼다면, 헨델은 아름다운 일상으로 자기 음악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악보 위의 선율만이 아니라, 하인과 고아, 곤궁한 이들에게 베풀었던 나눔으로 더 빛났습니다. " - 지강유철

지강유철 선생님의 “헨델극장” 북콘서트:
김기석목사님, 정윤수교수님, 정용철교수님 우정의 무대까지
깊은 통찰과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음악보다 인간이 먼저라는 지강 선생님의 확고한 신념은
헨델에 그대로 투영되어, 헨델의 음악보다 헨델이라는
인간을 먼저 바라 보게 만들었지요.
그 바람에 그 어떤 북콘서트에서도 보기 힘든 “딱딱한” 시간😅
기정의 단단한 관습과 편견을 깨려면 그만큼 단호한
가치관이 필요하니깐 말이죠.
그 딱딱함이야말로 흐물흐물 물컹거리는 이 줏대없는
시절에 필요했던 어른의 일갈이었습니다.

지강선생님은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우리나라(뭐 실은
전세계 동일) 클래식 소비 문화와 헨델에 대한 오해를
날카롭게 정면으로 부숴나갔습니다.
메시아만 유독 소비되는 현상이 오히려 한 인간으로서
헨델이 살아낸 치열한 삶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을 거의 비분강개하듯😅

헨델극장이란 제목이 그의 바로크 오페라 공연을 위한
극장/공연장을 떠올리게 하지만(당연히 나도 책을
처음 봤을 땐 그렇게 추측)
헨델의 ‘극장’이야말로 시대와 싸우는 무대였습니다.
그가 말년에 오페라에서 오라토리오로 전향한 이유가
단순한 흥행 실패 때문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 검열과의
투쟁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헨델이 당대 사회의 모순,
위선, 정치적 억압에 음악이라는 무기로 정면 대항했던
치열한 삶의 터전이 바로 그 극장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그 무대, 극장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인간 헨델.
짧은 제목에 담긴 깊은 통찰이 헨델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하여 책의 프롤로그도 헨델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말하지만,
어쩜 그렇게 우린 헨델을 잘 몰랐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오해 이전에 아예 이해가 없었던듯.
하여 인간 헨델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활발하게 열리는 북콘서트도 추천드리고요.
인간 헨델이 발 디디고 숨 쉰 시대와 역사와 종교와 음악이
더불어 따라옵니다. 인간 헨델의 극장 위로요. - 표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