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영성

“하나님의 헤세드” – 숨이 멎을 듯한 사랑 - * 말씀: 호세아 6장 6절 ‘하나님의 인애(헤세드)’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ree610 2025. 10. 31. 08:10

“하나님의 헤세드” – 숨이 멎을 듯한 사랑 -
* 말씀: 호세아 6장 6절

‘하나님의 인애(헤세드)’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답답해서가 아니다. 가슴이 뛰고, 목이 저미고, 영혼이 떨리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은 너무 깊어서 언어가 미치지 못하고, 너무 오래되어 시간의 틀에도 온전히 담지 못한다. 그 압도적인 사랑 앞에서 인간의 말은 늘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호세아의 선언은 이 헤세드의 핵심을 보여준다.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호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외쳤다. 그 때 그는 신학자가 아니라 상처받은 연인이었다. 배신당한 사랑의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하는 자의 음성을 토해내는 예언자였다. 그는 ‘죄의 신학’을 말하기보다 ‘사랑의 신학’을 노래했다. 그 사랑은 도덕적 관용을 넘어선, 영원한 언약적 열정이었다.
그것이 바로 헤세드, “끈질긴 사랑”, “언약에 충실한 사랑”이다.

1. 언약의 심장박동

헤세드는 성경 속 가장 심오한 단어 중 하나다. 그것은 단순히 ‘자비’도, ‘친절’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신실하신 사랑이다. 사람의 변덕에 좌우되지 않고, 인간의 죄악에도 굴하지 않는다. 히브리 사상에서 언약이 머리라면, 헤세드는 그 심장의 박동이다. 그 박동이 멈추면 신앙은 생명력을 잃고 껍데기뿐인 제도만 남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제사보다 인애(헤세드)를 원한다.”
고대 종교가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드릴 때, 호세아의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인간의 진심어린 마음을 원하셨다.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그 ‘아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다. 이 앎은 학문이 아니라 헌신이고, 개념이 아니라 가슴에 품어 안는 사랑이다.

2.  배신당한 사랑의 신학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를 배웠다. 음란한 아내 고멜의 반복된 배신에도 그는 여전히 기다렸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어리석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랑을 ‘나의 사랑’이라고 부르셨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

이것이 헤세드의 신학이다. 배신당했으나 버리지 않는 사랑, 상처 입었으나 여전히 품는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진심이다. 이 사랑은 인간의 정의를 초월한다. 헤세드는 응보를 멈추고, 기억을 새롭게 하는 사랑이다. 죄의 기억보다 사랑의 기억이 더 오래가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식이다.

3. 헤세드의 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분의 삶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원하노라”는 말씀의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사랑으로, 피로, 용서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헤세드의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를 온몸으로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죄인의 식탁에 함께 앉으시고, 눈먼 자를 만지시며, 병든 자를 고치셨다. 그분의 삶은 율법의 제사보다 긍휼을 택하는 헤세드의 실천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용서의 복음’을 외치셨을 때, 헤세드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피와 눈물로 드러난 가장 숭고한 얼굴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헤세드의 사랑은 역사를 지나 또 한 사람의 심장을 두드렸다. 508년 전 오늘, M. 루터는 바로 그 사랑 앞에서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단순한 교리의 변화가 아니라, 은혜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나 자신도 이 헤세드라는 단어를 읽을 때마다 숨이 멎고, 다시 가빠진다. 그것은 두려움의 멈춤이 아니라, 사랑의 충만함에 벅차서 오는 숨 고름이다. 신학은 결국 하나님을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에 압도당하는 학문이다.
그 순간, 우리의 신앙 고백은 더 이상 차겁고 건조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시 36:7)라는 시편 기자의 탄성이 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감동과 진정성으로 충만한, 그래서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신학으로 거듭난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우리 숨을 멎게 하고, 다시 살게 하는 경탄이다.”(God’s hesed takes our breath away, and gives it back again)

*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주님의 헤세드를 생각할 때
우리 숨이 멎고, 다시 가빠옵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더 경이롭고,
설명할 수 없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인 제사에 머물지 않고,
인애와 지식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