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함부로 낙타를 밧줄로 바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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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중학생 무렵이었던 것 같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사에서 나온 상식백과 비슷한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그 유명한 말씀이, 사실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후대에 잘못 전해졌다고 했다.
제법 그럴듯했다. 밧줄과 바늘귀라면 굵기의 문제이니 비유로서 한결 자연스러워 보였고, 무엇보다 “교회에서 안 가르쳐 준 진짜 이야기”라는 묘한 쾌감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얼마 전, 요즘 유명한 일타강사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어쩌다 알고리즘에 걸려 떴다. 수십 년 전 내가 받았던 그 충격을, 지금도 많은 사람이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 강사를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그분보다는 내가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문은 낙타가 맞다. “밧줄”은 원본이 아니라 후대에 끼어든 곁가지다. 그런데 이 곁가지가 어쩌다 생겨났는지를 들여다보면, 성경이 어떻게 베껴지고 전해졌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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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람어의 그림자
먼저 가장 바깥쪽 배경부터 보자. 예수께서 일상적으로 쓰신 말은 아람어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혼동의 뿌리가 헬라어 사본 단계보다 더 이른 아람어 전승 어딘가에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아람어에서 “낙타”는 가믈라(גַּמְלָא)인데, 이 단어가 “밧줄”도 함께 뜻했으리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출처는 분명하다. 20세기 초 조지 램사가 시리아어 페시타를 영어로 옮기면서, 아람어 가믈라가 “밧줄”과 “낙타”를 둘 다 뜻하며 밧줄이 낙타 털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고 각주를 단 데서 비롯됐다.
다만 솔직히 말해 두자. 이 “밧줄=가믈라”설은 어휘 증거가 분명치 않아 학계 주류가 받아들이지 않는 가설일 뿐이다. 실제로 사본에 나타난 “밧줄” 문제의 직접적 무대는 아람어가 아니라 헬라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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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글자 차이 (카멜로스와 카밀로스)
여기서부터가 핵심이다. 헬라어에서 낙타는 카멜로스(κάμηλος)다. 그리고 굵은 밧줄, 특히 배의 닻을 묶는 케이블을 뜻하는 단어로 카밀로스(κάμιλος)가 있다.
두 단어를 나란히 놓아 보자.
κάμηλος (카멜로스, 낙타)
κάμιλος (카밀로스, 밧줄)
차이는 단 한 글자, 가운데 모음이 에타(η)냐 이오타(ι)냐 하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완전히 똑같다. “밧줄설”은 바로 이 한 글자에 기대고 있다.
실제로 이 주장에는 오랜 내력이 있다. 멀리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같은 교부가 “여기서 낙타는 짐승이 아니라 배에 쓰는 굵은 밧줄”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카밀로스가 본래 “밧줄”이라는 어엿한 단어로 따로 존재했다면, 거꾸로 그것이 “낙타”의 본래 모습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정황은 오히려 반대다. 본래 낙타였던 것이 일부 사본에서 밧줄로 흘러갔고, 그것을 교부들이 “이게 원래 뜻”이라고 사후에 설명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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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본의 무게를 달아 보면
본문비평은 사본의 숫자를 세는 일이 아니라 무게를 다는 일이다. 어느 쪽이 더 오래되고, 더 신뢰할 만하며, 더 폭넓은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증언되는가를 따진다.
이 기준으로 보면 판정은 명확하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비롯해 가장 이르고 신뢰할 만한 사본들은 예외 없이 “낙타”를 증언한다. “밧줄”을 담은 것은 대개 10세기 이후의 중세 사본들, 곧 ‘가족 13’으로 불리는 사본군과 소수의 후대 사본뿐이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밧줄” 읽기는 세 복음서에 고르게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 변형은 주로 마가복음 10장 25절과 누가복음 18장 25절에서만 보이고, 정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마태복음 19장 24절은 거의 언제나 “낙타”다. 만약 “밧줄”이 원본이었다면 이렇게 들쭉날쭉할 까닭이 없다. 늦은 시대에, 일부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끼어든 흔적인 것이다.
여기에 본문비평의 또 한 가지 중요한 법칙이 맞물린다. 라틴어로 lectio difficilior potior, “더 어려운 읽기가 더 원본에 가깝다”는 원칙이다. 필사자는 어색하거나 충격적인 본문을 매끄럽게 다듬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멀쩡한 본문을 굳이 어색하게 비트는 일은 거의 없다. 자연스럽게 바꾸기는 쉬워도, 억지로 어렵게 바꾸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낙타가 바늘귀로”라는 도무지 불가능한 표현이야말로 필사자가 만들어 낼 이유가 없는, 그래서 원본일 수밖에 없는 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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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이런 혼동이 생겼나 (발음, 받아쓰기, 기억)
그렇다면 후대 필사자들은 왜 낙타를 밧줄로 바꾸어 적었을까. 여기에는 세 겹의 자연스러운 원인이 포개져 있다고 본다.
첫째는 이타시즘이다. 고전 헬라어에서는 에타(η)와 이오타(ι)가 분명히 다른 소리였다. 그러나 신약 시대 무렵부터 발음이 변하기 시작해, 여러 모음이 점차 “이(i)” 소리 하나로 수렴해 갔다. 오늘날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이 글자들이 모두 “이”로 발음된다. 신약 시대는 바로 그 변화가 진행되던 한복판이었다. 그 결과 카멜로스와 카밀로스는 글자로는 한 글자 다르지만, 귀로 들으면 거의 같게 들리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둘째는 받아쓰기, 곧 구술 필사의 관행이다. 고대에 사본을 여럿 복제할 때는 한 사람이 원본을 소리 내어 읽고 여러 필사자가 동시에 받아 적는 방식이 흔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음이 거의 같은 두 단어가 있으면, 귀로 들은 사람이 어느 쪽을 적어야 할지 헷갈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카밀로스”라고 들었다고 믿고 적어 버리면, 낙타가 밧줄로 둔갑한다.
셋째는 기억의 오류다. 필사자가 한 구절을 읽거나 들은 뒤 머릿속에 담았다가 옮겨 적는 짧은 순간에도 오류는 끼어든다.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비슷한 말로 바꾸거나, 다른 본문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적으로 손이 미끄러지는 일이 일어난다.
이 셋을 종합하면 그림이 분명해진다. “밧줄”은 누군가 예수의 말씀이 너무 과격하다 여겨 일부러 누그러뜨린 신학적 개작이라기보다는, 발음이 거의 같아진 두 단어 사이에서 받아쓰기와 기억의 틈을 타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필사 오류로 보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다. 그 결과가 마치 부자의 구원을 조금은 덜 불가능해 보이게 만들었을 수는 있어도,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설령 밧줄로 읽는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밧줄이든 닻줄이든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비유의 핵심은 “굵기의 비교”가 아니라 “불가능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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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낙타와 바늘귀, 고대의 흔한 과장법
“밧줄설”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이유 하나는, “낙타가 바늘귀에”라는 표현이 너무 터무니없어 무언가 오류가 있을 거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과 랍비 문헌에는 이런 식의 과장법이 오히려 흔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베라코트 55b에서, 랍비 라바는 사람이 현실에 없는 것은 꿈에도 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예로 “금으로 된 야자나무도, 바늘귀를 지나는 코끼리도 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바바 메치아 38b에서는, 지나치게 정교하고 억지스러운 논증을 펴는 학자들을 두고 “바늘귀로 코끼리를 밀어 넣는 푼베디타 사람”이라고 빗댄다.
흥미롭게도 이 두 본문의 짐승은 낙타가 아니라 코끼리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그 이름대로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사산조 페르시아 치하의 바빌로니아 (오늘날 이라크의 두 강 유역)에 자리 잡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형성된 문헌이다. 수라와 푼베디타 같은 학원이 그 중심이었는데, 앞서 본 “푼베디타 사람”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페르시아·인도와 통하던 이 지역에서는 코끼리가 “엄청나게 거대한 것”의 대표 이미지였다.
같은 발상이 팔레스타인으로 오면, 그 땅에서 가장 친숙한 대형 짐승인 낙타로 바뀐다. 짐승의 종류가 다를 뿐, 발상은 똑같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짐승과 가장 작은 구멍을 짝지어, 절대적 불가능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수사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낙타와 바늘귀를 짝지으신 것은 실수도, 과장의 사고도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익숙하고 강력한 불가능의 이미지였다. 이것을 “밧줄”로 바꾸어 적당히 가능해 보이게 만드는 순간, 우리는 비유의 폭발력을 스스로 김빠지게 만드는 셈이다. 예수의 본뜻은 분명하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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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며
이 작은 사례에서 나는 두 가지를 배운다.
하나는 겸손이다. 교회에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만나면, 우리는 쉽게 “이게 진짜구나” 하고 끌린다. 그러나 내가 못 들어 봤다는 것이 그 이야기가 새롭다는 뜻도, 옳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오래전에 충분히 검토되어 폐기된 이야기일 때가 많다. 새로워 보이는 주장일수록, 그것을 떠받치는 근거의 무게를 한번쯤 달아 볼 일이다.
다른 하나는 신뢰다. 기독교 역사를 의심의 눈으로만 보면, 권력과 기득권을 위해 성경을 고치고 왜곡한 사람들의 음모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곁에는 언제나 무엇이 본문의 바른 읽기인지를 밝히려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 한 글자 차이를 두고 수백 수천의 사본을 대조하며, 때로는 자기 목숨까지 걸었던 이들이다. 그 수고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낙타”를 낙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 낙타를 줄로 바꾸지 마라. 그것은 본문을 고치는 일일 뿐 아니라, 그 본문을 지켜 온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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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 : ‘바늘귀 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밧줄설” 못지않게 자주 듣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예루살렘 성벽에 ‘바늘귀’라 불리는 작은 쪽문이 있어서, 낙타가 짐을 다 내리고 무릎을 꿇어야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가능”이 아니라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라는 풀이다.
이 역시 엉터리다. 그런 이름의 문이 예루살렘 성벽에서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역시 엉터리다. 그런 이름의 문이 예루살렘 성벽에서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발상은 11세기에 이르러서야 한 주석가가 본문을 그럴듯하게 풀어 보려 "아마 그런 작은 문이 있었으리라" 추정한 데서 비롯된, 고대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중세의 창작이다. 그것이 오랜 세월 설교와 성지 안내를 거치며 마치 실재한 문처럼 굳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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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본문을 누그러뜨리려는 두 가지 시도, 곧 “밧줄”과 “바늘귀 문”은 출처도 시대도 다르지만 노리는 바는 똑같다.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조금만 애쓰면 될 일로 바꿔 놓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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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생각해보면 부자되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놓기 어렵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는 가고 싶고, 부자되기도 절대로 포기 못하겠고...
- 김한원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