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주의 나무, 은혜의 십자가
* 말씀: 신명기 21장 23절
우리는 실패한 사람을 오래 기억한다. 누군가의 실수는 쉽게 알려지고, 잘못은 빠르게 퍼지며, 한 번 붙은 낙인은 오래 남는다. 세상은 종종 사람을 회복시키기보다 전시한다. 넘어지는 순간을 반복해서 보여 주고, 수치를 끝까지 붙들어 둔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 21장 23절은 오래된 율법이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를 날카롭게 비춘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1. 거룩은 죽음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신명기 21장 22-23절은 사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 두지 말라고 명령한다. 고대 세계에서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것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치의 전시였다. "이 사람은 공동체에서 끊어진 자"라는 공개적 낙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체를 밤새 방치하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라고 하신다.
죄는 심각하다. 심판도 가볍지 않다. 그러나 심판받은 사람의 몸조차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룩은 죄를 미워하지만, 사람의 존엄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2. 수치를 영원히 걸어 두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죄와 심판의 가시적 표지였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 없다. 죄는 생명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깨뜨리며, 공동체를 더럽힌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놀라운 제한이 있다. “수치를 영구화하지 말라. 죽음을 구경거리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영원한 수치 속에 가두지 않는다. 복음은 죄를 덮어 버리는 값싼 위로가 아니다. 동시에 사람을 끝까지 정죄하는 판결문도 아니다.
3. 예수님이 저주의 자리에 서시다
신명기 21장 23절은 바울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시 열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여기서 십자가의 신비가 드러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죄인들이 받아야 할 저주의 자리에 서셨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상징을 넘어 대속의 자리다. 율법 아래에서 나무는 저주의 표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나무는 구원의 표지가 되었다. 수치의 장소가 영광의 장소가 되었고, 죽음의 형틀이 생명의 문이 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거룩한 역전이다. 저주의 나무가 은혜의 십자가가 되었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사고와 전쟁과 재난 속에서 죽어 간 사람들은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생명이다. 거룩한 공동체는 죽음을 소비하지 않고 애도한다.
우리는 수치당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세상은 실패한 사람, 죄지은 사람, 무너진 사람을 쉽게 조롱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영원한 수치 속에 가두지 않는다.
우리는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 저주의 나무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다.
"네가 받아야 할 수치와 저주를 내가 짊어졌다. 이제 너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 안에 서라.“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절망을 마지막 말로 삼을 수 없다. 내 실패가 내 전부가 아니다. 내 죄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크지 않다. 내 수치가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깊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 기도문
은혜로우신 하나님,
저주의 나무 위에서 은혜의 십자가를 이루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와 수치를 친히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하소서.
우리의 실패가 끝이라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무너진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며,
그 곁에 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