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길

최고의 지혜 -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큰 지성이다. 누가 내게 “왜 학문을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내가 학문을 하는 궁극적 목적은..

ree610 2026. 5. 29. 12:58

최고의 지혜 -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가장 큰 지성이다.

나는 평소 강의 중에 누가 내게 “왜 학문을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내가 학문을 하는 궁극적 목적은 ‘역사와 나를 객관화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인간에게 가장 큰 지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러나 사람의 품격과 인성을 살필 줄 아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감정의 안쪽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 욕망의 거울로 타인을 해석하고, 자기 경험의 울타리 안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속는다. 타인에게 속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 자기 확신에 속고, 자기 정의감에 속고, 자기 선의에 속는다.

철학은 바로 이 자기기만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통찰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결국 사람을 보는 눈은 세상을 많이 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어둠을 오래 응시한 사람에게 비로소 생겨난다.

대개의 인생은 자신의 선의를 과신하고, 자신의 정의를 절대화하며, 자신의 감정을 진실이라 착각한다. 학문과 수양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 자기기만의 안개를 걷어 내는 데 있다. 동양의 성현들은 오래전부터 사람을 보는 눈을 최고의 지혜로 여겼다.
옛 성현들은 “관수유술 필본기원 (觀水有術 必本其源)”이라 하였다. 물을 알려면 흐르는 물결만 보지 말고 그 근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강물이 아무리 넓고 화려하게 흘러도 그 근원이 탁하면 결국 전체가 흐려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말재주나 외양이나 일시적 능력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무엇을 부끄러워하는가, 무엇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가, 이익과 신념이 충돌할 때 어느 편에 서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학벌과 지식, 직함과 성취를 지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성의 외형일 뿐이다. 진정한 지성은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다. 어떤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때 어떻게 변하는가, 약자를 대할 때 어떤 눈빛을 가지는가, 자기 이익 앞에서 양심을 얼마나 지키는가를 읽어내는 능력, 바로 그것이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인격을 읽어내는 능력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의 화려함에 쉽게 매혹되고, 이미지의 연출에 속으며, ‘능력’을 ‘인성’과 혼동한다. 그러나 역사는 늘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무능한 사람’보다 ‘인격이 타락한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동양 철학은 오래전부터 인간을 보는 안목을 ‘관인(觀人)’이라 불렀다. 사람을 본다는 것은 단지 성격을 파악하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무엇 앞에서 무너지고 무엇 앞에서 침묵하는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공자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고, 그 동기를 살피며, 무엇에 편안해하는가를 보라[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라고 했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반복해서 편안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비극을 줄이는 윤리적 지혜이며, 공동체를 지키는 윤리적 능력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결국 인생의 방향은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친구를 곁에 두는가, 어떤 지도자를 선택하는가, 어떤 스승의 말을 믿는가에 따라 삶의 품격은 달라진다. 인간에 대한 통찰은 곧 ‘자기 운명을 선택하는 능력’인 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보는 눈은 타인을 평가하려 할 때보다 자신을 성찰할 때 더 깊어진다. 자기 안의 비겁함을 본 사람은 타인의 비겁함을 함부로 조롱하지 않는다. 자기 안의 허영을 발견한 사람은 타인의 과시욕을 쉽게 이해한다.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냉소 대신 연민이 생기고, 혐오 대신 절제가 생긴다. 그래서 진정한 지성은 차가운 우월감이 아니라 따뜻한 이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오늘날 시대는 점점 사람보다 시스템을 믿고, 인격보다 효율과 속도를 숭배한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인간의 탐욕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다.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며, 문명을 지탱하는 것도 인간의 품격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수준은 얼마나 뛰어난 기술을 가졌는가보다 얼마나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가장 큰 지성이라는 말은, 결국 인간 이해가 모든 학문의 최종 목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철학도, 역사도, 종교도 결국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지식은 위험해지고,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권력은 폭력이 된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알아보았는가?’이다. 진실한 사람을 곁에 두는 안목, 권력보다 인격을 먼저 보는 눈, 화려한 말보다 침묵 속의 양심을 읽어내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긴 역사 끝에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높은 형태의 지성인지도 모른다.  ---  霞田 박황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