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신학인의 정체성과 소명 - 김흡영 (조직신학회) 고린도전서 4: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ree610 2026. 5. 18. 08:24

신학인의 정체성과 소명
- 김흡영 (조직신학회)

* 본문: 고린도전서 4: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존경하는 한국조직신학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신학의 동역자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 한국조직신학회 전국대회의 주제는 "교회의 공공성과 신학의 과제"입니다. 더없이 절실한 주제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공적 책임을 감당할 것인가, 신학은 이 시대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 우리는 모두 이 물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먼저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신학인은 누구냐?"
"신학자는 무엇을 맡은 사람이냐?"
바울은 짧고도 깊은 말로 대답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신학인의 정체성과 소명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에게 이 말씀은 단순히 오늘 설교를 위해 고른 본문이 아닙니다. 제 신학의 여정 속에서, 특히 도의 신학을 사유하며 걸어오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친히 맡겨 주신 말씀입니다.

신학은 나의 사상이 아니라 맡겨진 말씀입니다. 신학은 나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 앞에 선 떨림입니다. 신학은 내가 소유하는 지식이 아니라, 나를 사로잡고 나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일꾼
바울은 신학인의 정체성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학자는 신앙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도 아닙니다. 진리의 소유자도 아닙니다. 신학자는 먼저 섬기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말은 더욱 두렵습니다. 우리는 종교 지식의 관리자가 아니고, 교리의 기술자도 아니며, 학문 시장의 전문가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맡은 사람들입니다.

루돌프 오토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비밀은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 두렵고도 매혹적인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압도하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끌어당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신학자는 먼저 무릎을 꿇는 사람입니다. 신학자의 첫 자리는 강단도, 학회도, 책상도 아닙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선 침묵과 경외입니다.

서구 신학은 이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성은 안셀름이 정의한 신학, fides quaerens intellectum, 곧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의지는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마땅히 해야 할 것" 앞에 섭니다. 감정은 슐라이어마허가 말한 "절대의존의 감정"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귀중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성, 의지, 감정이 서로 분리될 때입니다. 지·정·의가 갈라질 때, 신학은 차가운 지식이 되거나 방향 없는 열정이 되거나 경직된 도덕주의로 굳어 버릴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지혜는 우리에게 다른 통찰을 줍니다. 참된 마음은 지·정·의가 분리된 마음이 아니라 통전된 마음, 곧 도심(道心)입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따로 떨어진 덕목이 아니라 한 길 안에서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은 비로소 도를 걷는 존재가 됩니다.

성경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로고스는 추상적 이성 원리가 아닙니다. 히브리적 다바르(davar), 곧 하나님의 말씀은 말이면서 사건이고, 선포이면서 행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됩니다. 로고스가 길(道)이 됩니다. 체와 용이 나뉘지 않고, 앎과 삶이 나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주목할 점은 예수께서 "나는 로고스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다"라고 하십니다. 헬라어로 hodos, 곧 길입니다. 동아시아의 언어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도(道)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론은 단지 Christo-Logos에 머물지 않고, Christo-Dao — 곧 그리스도의 길을 묻는 신학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가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학문으로 엄숙하게 정초하였다면, 오늘 우리는 그것을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도학(道學)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과 윤리가 나뉘지 않고, 교리와 삶이 나뉘지 않고, 믿음과 실천이 나뉘지 않는 길(道)입니다. 참된 신학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이르는 길과 십자가의 도(道)를 바르게 닦는 일입니다.

3. 충성이라는 소명
그러면 신학인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한 단어로 말합니다. 충성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은 성공이 아닙니다. 명성도 아닙니다. 영향력도 아닙니다. 논문 수나 인용 지수도 아닙니다. 충성은 맡겨진 것을 왜곡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충성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교단과 전통과 교리에 대해서도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교단에 대한 충성이 복음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교리에 대한 충성이 그리스도의 길(道)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교리는 복음을 보존하기 위한 그릇이지, 하나님을 가두는 감옥이 아닙니다. 교단은 신앙의 역사적 집이지, 하나님 나라를 대체하는 성(城)이 아닙니다.

조직신학자는 교단의 교리를 수호하는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조직신학자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전통 안에 막힌 길을 다시 여는 사람입니다. 교리가 주님께 가는 길을 가리킬 때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교리가 주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을 때, 신학자는 다시 그 길을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학자의 정체성이고, 이는 신학적 상상력을 요청합니다. 상상력은 허황된 창작이 아닙니다. 신학적 상상력은 주님께 가는 길을 다시 돌아보는 능력입니다. 막힌 길에서 길을 보는 능력이요,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을 보는 능력이며, 교회의 폐쇄성 속에서 공공성을 다시 보는 능력입니다.

오늘 교회의 공공성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공성은 단지 교회가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공공성은 교회가 하나님의 비밀을 공적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권력의 길을 심판하고, 부활의 희망이 절망의 구조를 흔들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회의 상처를 품는 것입니다.

4. 경계인의 신학
신학도, 신학자, 신학인은 그래서 경계인입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서고, 학문과 기도 사이에 서고, 전통과 미래 사이에 서고,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에 서고, 교리와 삶 사이에 섭니다. 경계는 위험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과학에서 경계 조건이 없으면 방정식은 현실을 만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신학도 경계 조건을 외면하면 추상적 체계로 남습니다. 신학은 교회의 아픔, 민중의 한(恨), 세계의 고통, 생태계의 신음, 기술 문명의 불안이라는 경계 조건 속에서 다시 복음을 물어야 합니다.

신학인의 길에는 한이 있습니다. 신학자는 교회의 상처를 봅니다. 역사의 고통을 봅니다. 자기 시대의 모순을 봅니다. 때로는 자기 전통의 한계도 봅니다. 그 한은 신학자에게 영혼의 밤이 됩니다 — 서구 영성 전통이 말하는 dark night of the soul, 곧 영혼의 어두운 밤입니다.

그러나 한이 원망으로만 머물면 우리를 파괴하게 됩니다. 한이 기도 속에서 깊어질 때, 그것은 신학의 깊이가 됩니다. 고독도 그렇습니다. 신학자의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외로움이 하나님 앞에서 정화될 때, 그것은 holy solitude — 거룩한 홀로 있음이 됩니다. 신학자는 군중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 나가며: 다시, 충성으로
사랑하는 신학의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맡은 것은 작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습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입니다. 이 비밀은 십자가입니다. 이 비밀은 부활입니다. 이 비밀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길(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인가?
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인가?
나는 충성된 사람인가?

오늘 한국 교회와 신학은 많은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교회는 신뢰를 잃어가고, 사회는 분열되며, 젊은 세대는 교회의 언어를 낯설어하고, 기술 문명은 인간의 의미를 근저에서 다시 묻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신학인의 소명은 더욱 무겁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천재성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과다"라고도, "인기다"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은 길을 계속 걷는 것입니다. 충성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은 부활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은 교회를 사랑하되 우상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은 전통을 존중하되 생명의 길을 막지 않는 것입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받은 비밀을, 이 시대의 언어로, 그러나 복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다시 신학인의 첫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선 자리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선 자리이며, 부활의 빛을 기다리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세상으로 보냄받는 자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맡기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신학인으로서, 교회의 공공성과 신학의 과제 앞에서, 주님께 가는 길(道)을 바르게 닦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