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한 주간을 본문에 머무르는 일: 설교 준비 실제(최주훈 목사) 가장 실제적인 주제를 다뤄봅시다. 도대체 한 주에 한 편의 설교를 어떻게

ree610 2026. 5. 14. 07:43

한 주간을 본문에 머무르는 일: 설교 준비 실제(최주훈 목사)

  가장 실제적인 주제를 다뤄봅시다. 그래서 도대체 한 주에 한 편의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전에 제가 신학교에서 배운대로라면 본문 주해, 신학적 적용, 예화 배치, 결론 정리, 이 네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그렇게 작업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 주 동안 설교 본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은 좀 더 천천히, 좀 더 뭉근한 방식을 취합니다. 여러분에게 정답으로 권하는 것이 아니라, 제 작업 방식으로 들어 보시고 자기 결을 찾아가시길 권합니다.

저의 한 주는 주일 오후에 시작합니다. 그날 오전 강단에서 한 본문을 풀어내고 내려오면, 곧 다음 주 본문을 펼칩니다. 교회력 성서정과가 정해 준 본문입니다.

그것을 처음에는 그저 소리 내어 읽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읽습니다. 여러 번역을 비교해 가며 읽기도 하고, 가능하면 원어로도 한 번 훑어봅니다. 이 단계에서는 아무것도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저 본문이 제 입과 귀를 통과하게 둘 뿐입니다. 그렇게 본문을 한 주의 짐으로 짊어지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한 주간 그 본문이 머릿속을 떠다닙니다. 운전할 때, 산책할 때, 잠들기 직전과 깨어난 직후에 그 본문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 떠오름 자체를 일종의 기도라 여깁니다. 본문이 저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제가 본문에 따라가는 한 주입니다. 이 시간 동안 제가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무슨 뜻인가’가 아닙니다. ‘그때 거기서 무슨 뜻이었는가’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처음 들었을 1차 독자, 1차 청중을 떠올려 봅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어느 무명의 회중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비유를 들려주실 때 그 자리에 둘러서 있던 어부와 농부, 세리와 죄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등은 어떤 짐을 짊어지고 있었을까. 그들의 가슴은 어떤 두려움과 어떤 기다림으로 뛰고 있었을까. 그 본문이 그들에게 처음 닿았을 때 그들의 얼굴에 무엇이 번졌을까.

지난 주일 이야기로,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 14장이 발화되던 자리는 어떤 곳이었을까.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 복음서 기자는 왜 이야기를 기록해야만 했을까. 최초의 청중은 누구였을까 등등. 질문하고 그 답을 찾아갑니다. 이 자리에 도달하지 못한 설교는 결국 21세기 한국 사람의 자기 독백에 그치고 맙니다. 본문은 처음 들은 사람들의 자리 위에서 가장 정직하게 말합니다.

또 본문이 자리한 맥락을 살핍니다.
이 단락 앞에 무엇이 있고,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를 따져 봅니다. 한 본문은 결코 홀로 떠 있지 않습니다. 늘 앞 단락의 그늘과 뒤 단락의 빛 사이에 끼워져 있습니다. 그 자리를 모르면 본문은 박제된 인용구가 됩니다. 그렇게 한 주 중반에 이르면 본문 안에서 가장 묵직한 한 단어, 한 구절이 도드라져 떠오릅니다. 처음 읽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며칠 본문을 짊어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그 한 단어입니다. 저는 그 단어 앞에서 며칠을 더 머무릅니다. 그 단어가 본문 전체를 어떻게 떠받치고 있는지 손으로 더듬어 봅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 자리로 옮겨 갑니다.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자리입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설교는 자기 메시지의 도구가 됩니다. 본문을 자기 시대로 끌어내리기 전에, 먼저 자기가 본문 시대로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한 주를 살아 보고 나오는 사람만이 본문을 자기 회중에게 정직하게 옮길 수 있습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이 오면 그동안 머릿속에 쌓인 것을 한 편의 원고로 정리합니다. 처음엔 그저 낙서장 같은 분위기에서 시작하고, 점점 다듬어 갑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제가 끝까지 묻는 네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 질문은, 이 설교를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가. 핵심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으면 설교 전체가 흐릿해집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가.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 설교는 회중에게도 들리지 않는 공허한 소음이 되고 맙니다.

세 번째 질문은, 이 설교에 청중의 타성을 깨는 망치가 있는가. 너무 친숙한 본문, 너무 자주 들어 본 메시지일수록 회중의 귀는 자동으로 닫힙니다. 그 닫힘을 깨는 한 번의 타격이 본문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 설교는 회중을 깨우지 못합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 설교에 복음의 위로가 있는가. 망치만 있는 설교는 회중을 무너뜨리고 거기서 끝나 버립니다. 무너뜨린 자리에는 반드시 일으키는 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손이 보이지 않는 설교는 결코 강단에 올려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말씀드릴 것은, 성경 본문엔 구멍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건과 사건 사이에 빈틈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틈만 보면, 성경은 말도 안 되는 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글을 들이밀며 ‘믿음’과 연결한다는 게 썩 맘에 내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 틈은 하나님의 배려이자 선물, 심지어 나의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복음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즐거운 초대장으로 읽힙니다.

성경 본문에 목회자의 상상력이 개입하는 걸 두려워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은 그 정도로 품이 작거나 째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설교자가 가진 지식과 삶의 체험, 그리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와도 넉넉히 받아주실 분으로 저는 믿고, 이를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렇게 나온 설교문은 제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소명받은 공동체를 위해 둘도 없는 영혼의 먹거리가 됩니다.  

원고는 설교자의 신앙고백이다 - 글이라는 도야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 원고를 꼼꼼히 다듬는 편입니다. 강단에 오르기 전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며 다듬고, 군더더기를 깎아 내고, 흐름을 정돈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단순합니다.
설교 원고는 설교자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강단에서 한 말이 곧 그 설교자의 그 시점의 신학적 자화상이 됩니다. 자화상을 흐릿하게 그려 놓고 회중 앞에 내미는 것은 그 자체로 무책임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동역하는 이들, 특히 아직 안수받기 전의 모든 교역자들에게 원고 설교를 매우 강조합니다. 원고 없이 설교하지 말라고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동역자들이 주일 공동예배 설교를 할 일이 생기면 원고를 받아 빨간 펜으로 한 문장 한 문장 짚어 가며 점검합니다. 이 문장은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이 단어는 본문이 요구한 단어인가 아니면 자기 기질이 골라낸 단어인가, 이 결론은 본문에서 자란 것인가 아니면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본문을 끌어다 붙인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함께 원고를 다듬곤 합니다. 선임 목회자가 목사 후보생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타고난 언변가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원고 없이도, 심지어 설교 준비 없이도 한 시간 이상을 청산유수로 풀어냅니다. 회중은 박수를 치고 분위기는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솜씨가 마약과 같을 수 있다고 후배들에게 경고합니다. 한 번 박수를 받으면 다음 주에는 더 큰 박수를 원하게 되고, 어느 순간 회중의 박수가 자기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본문이 자기를 흔들기보다 자기가 본문을 흔드는 자리에 서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는 사이에 신학은 옅어지고 자아는 두꺼워집니다. 그 길의 끝에서 무너지는 목회자를 우리 모두 한두 번씩은 보아 왔을 것입니다.

반면에 글은 정반대로 작동합니다. 글은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글은 침묵하며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비춥니다. 어제 쓴 한 문장이 오늘 다시 보면 부끄럽고, 작년에 쓴 한 편의 설교가 올해 다시 읽으면 어디가 비어 있는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글은 설교자를 계속해서 깎아 냅니다. 박수처럼 단번에 들뜨게 하는 대신, 먼지처럼 천천히 쌓여 설교자를 도야합니다. 한 해, 두 해, 십 년이 지나고 나서 자기 원고들을 모아 놓고 보면 거기에 한 사람의 삶의 궤적, 신학이 변한 발자국이 그대로 남습니다. 그 발자국이 정직한 사람이 결국 강단에서도 정직해집니다.

오늘 함께 하신 여러분에게 이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작은 회중 앞이라도 원고를 가볍게 다루지 마십시오. 사람이 적기 때문에 더 정직해야 합니다. 큰 강단의 박수에 길든 사람들은 작은 강단에서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작은 강단에서 글로 자기를 도야해 온 사람은 회중이 백 명이 되어도, 천 명이 되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글이 그를 그렇게 빚어 왔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예배의 절반일 뿐이다
이제 다시 큰 그림으로 돌아가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국교회의 설교 문화에서 가장 위험한 자리는 설교자가 예배의 주인공이 될 때 생겨납니다. 모든 순서가 설교를 향해 달려가고, 설교가 끝나면 사실상 예배도 끝납니다. 그러나 루터교 예배에서 설교는 예배의 절반입니다. 설교 다음에 성찬이 이어지고, 그 성찬이 설교에서 들은 말씀을 회중의 몸에 새깁니다. 이 구조가 설교자의 짐을 덜어줍니다. 설교 한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깨우치는 일은 봉독이 합니다. 위로하는 일은 사죄 선언이 합니다. 결단의 자리는 성찬이 마련합니다. 설교자는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이 매주 강단에 서야 하는 목사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 "처치 브릿지" 원고 <예전과 설교> 중

*내가 설교 준비하는 법, 최주훈 목사의 글은  자세하면서도 내용이  좋다. 이런 준비가 실력과  영성이  자라게 하고 신학과  신상의 자리를 견고하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해보기를 추천한다. 설교자는 자기 고백의 자리와 신학의 자리가 없으면 공허한 소리로 흩어지는 말꾼이  된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존재하는 설교자이기를..... 이상갑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