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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두 개의 길: 이근안과 김근태> 한 사람은 고통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은 그 고통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이근안과 김근태...

ree610 2026. 4. 10. 14:09

<두 사람, 두 개의 길: 이근안과 김근태>

한 사람은 고통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은 그 고통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이근안과 김근태.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두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국가 권력의 이름으로 타인의 존엄을 무너뜨렸고, 한 사람은 그 권력에 맞서다 자신의 몸이 무너졌습니다. 한 사람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고, 한 사람은 그 고통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은 채 끝까지 감당하며 살아냈습니다. 이 차이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김근태 의장님을 떠올리면 늘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미디어에는 담기지 않았던 몸에 남아 있던 고문의 흔적, 그리고 사라지지 않던 통증이었습니다. 그 고통을 의장님은 원망으로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간됨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저는 그 거인의 어깨에서 민주주의를 배웠습니다. 민주주의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일은 결국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김근태 의장님은 65세의 생을 사셨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거인으로 살아 계십니다. 이근안은 88세의 삶을 살았지만, 우리 역사에는 ‘고문 기술자’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는 사회, 그것이 민주주의의 성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1980년대 군사정권 시기 ‘고문 기술자’로 불리며 국가 폭력의 상징이 되었던 이근안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근안은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반인륜적 고문과 인권 침해를 자행한 중심인물"이라며 "끝내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죄나 반성 없이 생을 마감했다. 가해자의 죽음이 그가 저지른 만행을 지울 수 없으며, 민주주의 역사에 새겨진 피해자들의 고통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남긴 생에 대한 역사의 평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생을 남기며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더 중요한 질문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입니다.

민주주의는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지켜집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정답을 배우는 것을 넘어, 이 질문을 스스로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할 교육의 역할이며,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근안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그 시대를 넘어, 고통을 견뎌온 분들께 위로와 연대를 보내며, 이 아픔을 다음 세대에 넘기지 않기 위해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 유은혜 (전 교육부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