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지 않는 새]
어제 나고야에서 공부를 했다는 인솔 가이드가 버스 안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세 영웅 즉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징적으로 비교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일화 “울지 않는 새” 이야기를 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다면, 죽여버려라.”라고 하였다.
鳴かぬなら 殺してしまえ (なかぬなら ころしてしま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다면, 울게 만들어 보이겠다”라고 말했으며,
鳴かぬなら 鳴かせてみせよう ホトトギス
(なかぬなら なかせてみせよう ほととぎす)
또 한 사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는다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鳴かぬなら 鳴くまで待とう (なかぬなら なくまでまとう)
여행하는 내내 나는 세 사람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 속에 빠져 들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냉혹한 결단 형의 혁명가이다. 그는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며 결단이 빠르다. 기존의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러나 혼노지의 변에서 부하의 반란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한 마디로 “안 되면 제거한다”라는 냉정한 현실주의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인간관계의 달인인 냉혹한 승부사이다. 그는 유연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처세의 능력이 탁월하다. 농민 출신으로 일본 통일을 완성한 인물이다. ‘원숭이(猿)’라 불리며 뛰어난 친화력을 보였다. “상대를 움직이게 만든다”라는 현실적 능력으로 전국 통일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형의 장기적 전략가이다. 그는 언제나 신중하고 계산적이며 인내력이 강하다. 긴 시간 기다려 최종 승리를 얻으며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장기적 통찰에 강한 의지적 인물이다.
이 세 인물은 단순히 성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본 통일 과정의 단계적 흐름을 상징한다. 노부나가는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였으며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을 완성’하였고 이에야스는 ‘체제를 안정’시켰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는 늘 단순한 문장이 깊은 시간을 품고 있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앞에 두고 세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했다는 이 짧은 구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서이자 인간론이다. 누군가는 ‘새를 죽이라’ 했고, 누군가는 ‘울게 만들겠다’라고 했으며, 또 누군가는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라고 했다. 그 말들은 단지 성격의 차이를 넘어, 한 시대를 건너온 세 가지 삶의 방식이며, 권력과 시간과 인간에 대한 세 가지 응답이었다.
나는 이 세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단순한 인물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본다. 불꽃처럼 타오르며 질서를 무너뜨리는 시간, 유연하게 흐르며 관계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시간, 그리고 보이지 않게 축적되며 결국 모든 것을 포섭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은 결코 과거 속에 머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나를 향해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어떤 시간 속에 서 있는가.
첫 번째 인물은 파괴를 통해 세계를 다시 쓰려했던 인간이다. 그는 기존의 질서를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의심했고, 낡았다고 판단하면 주저 없이 무너뜨렸다. 그에게 있어 울지 않는 새는 더 이상 기다릴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쓸모를 잃은 존재였고, 제거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그의 시선에는 언제나 ‘지금 당장’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미래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열어젖히는 것이었다.
그의 선택은 잔혹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한 시대의 필연이 있었다. 오래된 권위와 관습이 스스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버티던 시대, 그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폭력의 화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방식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파괴는 시작을 열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질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물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새를 죽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다리지도 않았다. 대신 울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 말 속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세상은 강제로만 움직이지 않고, 그렇다고 저절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설득과 관계, 계산과 연출 속에서 움직인다. 그는 사람을 읽었고, 상황을 만들었으며, 흐름을 바꾸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의 삶은 하나의 상승 서사였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출발하여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끊임없이 재해석했다. 그는 태생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태생을 전략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끊임없는 긴장과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만들어진 권력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멈출 수 없었고, 계속해서 다음을 만들어야 했다.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드는 일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행위다.
세 번째 인물은 가장 조용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가장 긴 시간이 흐른다. 그는 기다린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기다림이다. 어린 시절부터 타인의 손에 맡겨져 살아야 했던 그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선택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행동이 아니라 견딤이었고, 돌파가 아니라 축적이었다.
그에게 울지 않는 새는 아직 때가 오지 않은 존재다. 억지로 울게 만들 필요도, 제거할 필요도 없다. 다만 언젠가는 울 것이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그의 세계에서는 조급함이 가장 큰 적이다. 시간은 적이 아니라 자원이며, 결국 가장 오래 버틴 자에게 기회를 준다. 그는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의 질서는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이 세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어느 쪽이 옳은가를 묻는 순간, 이미 질문은 틀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고,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과 파멸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문제는 이제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 인간인가. 나는 때로 조급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을 견디기보다 바꾸고 싶어진다. 그 순간 나는 첫 번째 인물의 그림자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 선택이 남기는 흔적을 생각하면 쉽게 결단하지 못한다. 무언가를 무너뜨리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함께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나는 상황을 조율하려 한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흐름을 바꾸며,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유지한 채 결과를 만들어내려 한다. 그럴 때 나는 두 번째 인물과 닮아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점점 피로해진다.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나는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기다림은 종종 확신이 부족하다. 정말 때를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결정을 미루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자신도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세 번째 인물의 인내는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명확한 목적을 가진 축적이었을 텐데, 나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나는 세 사람 중 누구도 아니다. 나는 그들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는 존재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살아갈 수 없고,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요구받는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이 필요한가’를 아는 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과감히 끊어내야 하고, 때로는 끈질기게 설득해야 하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 그 판단은 언제나 어렵고,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간다.
울지 않는 새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기회’일 수도 있으며, 혹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앞에서 계속해서 선택해야 한다. '죽일 것인가', '울게 만들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그리고 아마도 평생 동안,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바꾸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 霞田 박황희 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