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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알려진 바와는 달리 무소유를 주창하던 스님은 인세 수익 만도 70억원이 넘는 자산가였다 어느날 스님은 출판사에 전화해 왜 인세를..

ree610 2026. 3. 7. 12:53

법정

알려진 바와는 달리
무소유를 주창하던 스님은 인세
수익 만도 70억원이 넘는 자산가였다

어느날 스님은 출판사에 전화해
왜 인세를 안보내느냐!고 호통을 쳤다
스님이 거두는 장학생들의 등록금 납부
마감기간이 닥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진 게 없지만 아이들의 꿈이
나의 재산이다’라고 스님은 말했다

1932년 해남에서 태어난 박재철은
목포대학 상과에 입학한 뒤 6.25가 터졌다
전쟁을 겪으며 고뇌에 빠진 재철은 오대산으로
출가하려고 길을 나섰다가, 폭설로 길이 막혀
안국동에서 효봉스님을 만나, 만난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는 절에 온 아줌마가
아, 그 빨래판같은 거요?라며 팔만대장경을 말하자
불경의 한글번역 필요성을 절감하고 번역에 힘썼다

1970년대 법정스님은 중생들을 돕기 위해
함석헌선생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이 되었고
김수환추기경 강원용목사등과 접촉하며
종교간의 대화에도 앞장섰다

1974년 인혁당사건후 민주화운동이 박해를 받을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지냈다

1976년에는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하여 탐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무소유를 포함한 다른 저서들을 통해 유명해지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져, 17년간 살았던 불일암을
뒤로 하고,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빈집에서 살았는데
그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4년에는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를 시작하여
김광석에게 원음(둥근 소리)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백석의 연인 김영한은 <무소유>를 읽은 후 스님에게
자신의 요릿집 대원각을 절로 만들어 달라고 했으나
10년동안 받아들이지 않던 스님은 결국 절의 이름을
길상사로 부르고 주지가 되었다

1998년 개원될 때는 김수환추기경이 축사를 했고
길상사 관음상은 천주교신자 최종태 작가가 만들었다
스님은 길상사가 개원된 후에 봄가을 강론을 위해서
길상사에 머무는 외에는 강원도로 돌아가 은거했다

2010년 3월 폐암 말기의 고통 속에서도 ‘자연의
이치대로 가겠다’며 연명치료를 거부한 채 입적했다
개인 통장도, 집도, 재산도, 한 푼도 남기지 않은 스님은
다음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 몸뚱아리를 처리하기 위해 나무들을 베지 마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넙적바위 위에 남은 땔감위에 얹어놓고 화장해 달라‘

‘사리는 찾지 말고 수의도 만들지 말고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내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무엇인가?
불교나 기독교 혹은 유태교나 회교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바로 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