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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어에 매달린 예수> 하늘로 솟구치는 예수의 등 뒤로 굵은 강철 와이어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뜩인다. 중력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기술과 부활의

ree610 2026. 4. 8. 08:51

<와이어에 매달린 예수>

하늘로 솟구치는 예수의 등 뒤로 굵은 강철 와이어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뜩인다. 중력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기술과 부활의 신비를 물리적으로 재현하려는 종교적 욕망이 결합한 기괴한 풍경. 2026년 광화문 광장은 그렇게 거룩함이 바닥난 ‘기계 장치의 예수’를 보여줬다.
그 와이어에 매달린 것은 한 명의 배우가 아니라,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 시각적 자극에 매달리게 된 한국 기독교의 처절한 민낯이다. 내부자들은 이를 두고 '은혜'라 칭송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대중의 눈에는 그저 조잡한 서커스이자 천박한 종교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 은혜라는 이름의 ‘집단적 기괴함’
광화문 퍼포먼스의 핵심은 ‘수직적 상승’에 있었다. 승천을 시각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와이어를 동원한 이 연출은, 역설적이게도 현대 기독교가 얼마나 영적 상상력을 잃어버렸는지를 폭로한다. 신자들은 공중에 뜬 예수를 보며 감격하고 환호했으나, 그 뜨거운 열기는 광장 바깥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대중에게 그것은 ‘영적인 사건’이 아니라, 도시의 미관과 상식을 해치는 ‘종교적 소음’이자 기괴한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우리끼리의 감동이 타인에게는 공포나 조롱거리가 되는 순간, 종교는 이미 사회적 소통 능력을 상실한 게토(Ghetto)로 전락한다.

- 신성함이 ‘구경거리’가 될 때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 소동은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이 <죽도록 즐기기>에서 경고한 ‘쇼 비즈니스로서의 종교’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포스트먼은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 매체가 지배하는 시대에 모든 고귀한 가치가 ‘오락’으로 변질된다고 보았다.
와이어로 사람을 끌어올리는 행위는 부활의 의미를 묵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가’ 혹은 ‘얼마나 실감 나는가’라는 시각적 흥미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종교가 영적인 영역을 기계적 장치로 대체하려 할 때, 그 안에 깃들어 있던 ‘본질적 숭고함’은 증발한다. 숭고함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경외심에서 나오지, 와이어의 장력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 저렴해진 거룩함
종교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저서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신적인 존재를 대면했을 때 느끼는 전율을 ‘누미노제(Numinose)’라고 불렀다. 그것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렵고도 매력적인 거룩함’이다.
하지만 광화문의 예수는 ‘누미노제’가 아니라 ‘구경거리’였다. 기적을 물리적 현상으로 강제 노출시키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기적을 모독한다. 대중들이 이 장면을 보며 느낀 ‘기괴함’과 ‘불쾌감’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성스러운 것을 세속적인 기술로 흉내 낼 때 발생하는 그 기괴한 불일치가 대중에게는 혐오감을, 신자들에게는 가짜 위안을 준 것이다. 신자들은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대중을 향해 ‘영적 소경’이라 비난하겠지만, 진짜 소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시각적 퍼포먼스에 가둬버린 그들 자신일지도 모른다.

- 와이어에 매달려 있는 기독교
기독교가 상식을 가진 대중과 멀어지는 지점은, 자신들의 ‘종교적 만족’을 ‘보편적 진리’로 착각하는 오만함에 있다. 와이어에 의존해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자화상이다. 스스로의 발로 땅을 딛고 이웃과 소통하며 나아가는 대신, 자본과 기술이라는 와이어에 매달려 위태롭게 영적 우월감을 뽐내고 있는 모습 말이다.
진정한 부활은 광장의 무대장치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의 정적 속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소외된 자의 손을 잡는 ‘수평적 이동’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이 기괴한 쇼를 멈춰야 한다. 와이어를 끊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하늘로 치솟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텅 빈 무덤의 침묵 속에서 ‘진짜 부활’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할 때다. - 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