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좋은 설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 저는 여행을 다닐 때 두 곳을 잘 가지 않습니다. 그곳은 대성당과 수도원입니다..

ree610 2026. 3. 28. 22:3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

1.
제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지만 저는 여행을 다닐 때 대개 두 곳을 잘 가지 않습니다. 그곳은 대성당과 수도원입니다.
일행과 단체 여행을 하다가 일정상 그 두곳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어도 할 수 있으면 저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성당을 들어가면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 지나쳐 보이는 웅장함과 화려함이 하나님과 하나님께 예배드림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려고 하는 마음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일까?
하나님을 빙자해서 사람들이 그 영광을 누리고 뽐내고 자랑하려고 그런 것은 아닐까?

대성당과 정반대되는 개념의 장소는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은 청빈이 강조되는 곳이고 가난하고 고생하고 인간의 모든 쾌락을 멀리하고 고행 하는 것을 강요하는 곳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가정을 떠나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노동하며 험한 음식을 먹으며 거의 하루 종일 기도와 묵상을 하며 지내며 죽어서도 수도원 밖을 나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장사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제 질문과 의문은 하나님이 과연 그것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격려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안타까워하시고 속상해 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난 너희들이 나 때문에 그렇게 금욕주의적으로 사는 것이 싫다. 제 생각입니다. 양심적인 생각입니다.

2.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여호수아 1장 7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기독교의 좌로나 우로 치우친 사상 중에 하나는 기복주의와 금욕주의입니다.

기복주의는 돈과 세상적인 성공과 형통함을 복으로 생각하고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예수 믿으면 세상적으로도 다 형통하고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부요함과 세상적인 성공과 형통함을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믿는 주의입니다. 거기에 빠지게 되면 예수를 믿는 이유가 부자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형통하기 위해서가 되는데 그것은 일반 미신적인 종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런 면을 강조하고 주장하면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교회는 숫적으로 부흥하고 발전하지만 기독교의 정통성이 무너지게 되어 미신적인 종교로 전락하게 될 위험성이 높아지고 커집니다. 돈이 나쁜 것도 아니고 성공이 나쁜 것도 아니고 형통함이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가 예수 믿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은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놓치게 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하게 됩니다.

기복주의와 반대되는 대척점에 또 다른 치우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욕주의입니다. 초대 기독교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물질과 세상과 육체를 천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악한 것으로 여기는 주의입니다. 금욕주의는 그런 영지주의적인 사고의 영향을 받는 신앙 형태하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요함과 세상적인 성공과 형통함을 버리고 욕심내지 않아야만 훌륭한 그리고 바른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운동이 수도원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대성당과 같은 형태는 기복주의 신앙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한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 받으신 한 주간 묵상하며 지내는 주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평시에는 몰라도 고난주간 한 주만이라도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자기 자신도 그 고난을 육체에 채워야 한다는 의식적인 무의식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금식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주간이 힘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금요일 하루 만이라도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분들도 있고 금식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주간 동안은 오락을 금하고 외식도 금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고난 주간에 오락을 한다거나 외식을 한다거나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행위로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바울이 이야기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일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고난주간 한 주간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에서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던 수도사들처럼 매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다. 한 주간만 형식적으로 그렇게 살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 것처럼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33년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풍요함과 세상적인 승리와 성공과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런 것들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8복 중에 그런 복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을 무조건 천하게 여기고 죄악시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1:19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일을 탐하시지 않으셨지만 그것을 무조건 죄악시하시고 멀리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 잘못 말했다가는 욕을 많이 먹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고난 주간에도 골프도 치고 외식도 합니다. 저는 고난주간에 골프 안치고 외식 안했다는 것으로 내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웠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 얌체같은 생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고난당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그 평화와 나음을 누리며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고난 당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거 우리가 지금 이렇게 복된 삶을 살게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 저는 양심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난주간이라고 특별히 보통 때와 다른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4.
그렇다면 바울이 이야기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육체에 채우며 사는 것인가? 겨우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금욕하며 오락을 삼가고 금식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육체에 채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고난주간에 금식을 하고 오락을 삼가고 금욕을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를 예수 잘 믿는 경건한 사람인것처럼 가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육체에, 삶에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기 위하여 당하는 고난,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당한 손해,
그런 고난과 손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높은뜻 교회는 2001년 10월 7일 높은뜻 숭의교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 넷으로 분립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왜 높은 뜻 숭의교회가 넷으로 분립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높은뜻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시작한 교회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통 교회들 보다 더 모나고 거칠고 엄격한 정관을 만들었습니다. 위임제도 없애고, 원로제도도 없애고, 신임투표도 받게 하는 등등등

교회가 숫적으로 제법 많이 커지고 성장하게 되었을 때 학교가 교회를 학교교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손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가 강당을 비워 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는 출석이 5000명쯤 되었었습니다. 그 숫자를 가지고 나갈데가 없었습니다. 나갈데가 없는데 나가게 되면 교회는 해체가 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외통수와 같은 수 였습니다.

장로님들이 저에게 이사장님과 점심 한 번 같이 하시지요. 그러면 해결이 될텐데요. 예 그렇게 하면 나오지 않아도 되었을겁니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지킬 수 있었을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교회 주인이 바뀌게 되는 거였습니다. 제 생각에 그랬습니다.

6.
길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길바닥에서 예배드릴 각오를 했습니다. 좋은 예배당에서 나와서 길바닥에서 예배를 한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격어야 할 고난 중에 최고의 고난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라는 의를 위하여 길바닥에서 예배드리는 고난을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길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면 교회 이름을 높은뜻 광야교회라고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갈데가 없었습니다. 연세대학교와 숭실대학교에서 콜이 있었지만 주변 교회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넉달을 남겨 놓고 9월 달 교회를 넷으로 분립하기로 하였습니다. 멀쩡한 교회를 넉달 만에 분립을 하고 네 교회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 식이었습니다. 다행히 세 교회는 예배처소를 기한 전에 정할 수 있었습니다. 높은 뜻 광성교회, 높은 뜻 정의교회, 높은 뜻 하늘교회. 여러분 교회 높은뜻 푸른 교회만이 안정적인 예배처를 결정하지 못한채 학교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남산문학의 집, 총회회관 강당,
남부순환로에 있는 어느 여자 고등학교 강당,
그러다가 겨우 서울고등학교를 기적적으로 허락받아 오늘까지 예배드리고 있는데 아직 까지도 조마조마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으로 분립하는 일이 넉달 안에 가능한 일인지
분립하여도 교회를 유지할 수 있는 일인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냥 안전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과 같은 삶의 식을 선택했습니다.

7.
우리 높은 뜻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라는 큰 목표를 위해 여섯가지 구체적인 실천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그 여섯가지 실천목표 중 하나가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오른 쪽으로 가도 하나님이 왼쪽이라하시면 왼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식과 법을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며 산다는게 고난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우리의 삶과 육체에 채우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고난주간 한 주간 정도 금식하며 새벽기도하며 오락을 삼가고 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 것이라고 퉁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강조하고 자랑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까지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난주간 한 주간만이 아니라 일샹 속에서 평생 고집하며 사는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교회를 넷으로 분립하는 것 쉽지 않았습니다. 매우 위험한 결단이었습니다. 교회가 흩어지고 없어지게 될까봐 하나님께 3000명은 남겨 달라고 애타게 기도하곤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 높은뜻 푸른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도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그것이 우리 높은 뜻 교회 특히 우리 높은 뜻 푸른 교회의 근육이 되었습니다. 제법 건강한 교회,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고 그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손해와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살아 하나님께 칭찬받고 축복 받는 우리 높은뜻 푸른 교회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김동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