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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법정의 역설 (막 15:1~5) 새벽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열린 법정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역설을 목격한다...

ree610 2026. 3. 20. 13:58

빌라도 법정의 역설 (막 15:1-5)

새벽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열린 법정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역설을 목격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이 공모하여 예수를 결박하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긴 이 사건은 단순한 종교 재판이 아니다. 그것은 마땅히 인간을 심판하셔야 할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세운 법정의 피고석에 서신, 완전히 뒤바뀐 순간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야 할 존재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의한 재판 앞에 서신다.
이것은 인간 반역의 극치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반역조차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드러낸다.

총독 빌라도의 질문은 정치적이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은 로마 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반역 여부를 묻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순히 “네 말이 옳다.”라고 답하신다. 이 대답은 단순한 긍정이 아니다. 오히려 빌라도가 이해하는 ‘왕’의 개념 자체를 새롭게 바꾸는 선언이다.

세상의 왕은 권력과 무력으로 지배한다. 그러나 예수의 왕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자기 비움과 희생,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의 왕권은 화려한 보좌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치욕의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대제사장들의 고발은 계속되지만 예수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신다. 이 침묵은 단순한 무력함이 아니다. 오히려 깊은 신학적 의미를 지닌 침묵이다. 이 순간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세속의 언어로 메시아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 침묵은 오래전에 예언된 장면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였다.” 예수의 침묵은 패배의 침묵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자발적 침묵이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침묵이 빌라도에게 깊은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그는 눈앞의 죄수가 단순한 패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 침묵 속에 설명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소리를 높여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침묵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신다. 새벽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여명이 더욱 또렷해지듯, 예수의 침묵은 인간의 불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정확히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 우리 역시 삶의 모순과 고통 속에서 묻는다.
“정말 당신이 나의 구원자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때때로 침묵으로 응답하신다. 그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나 방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앙의 증언자로 서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이며, 우리 마음속 소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시는 거룩한 기다림이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는 피고의 자리에 서 계셨다. 그러나 실상 그분은 여전히 역사의 주권자이셨다.
그 재판은 패배의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역사 속으로 침투하는 시작점이었다.
피고석에 왕으로 서신 예수, 그분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다림이며 사랑이다. - 황의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