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영성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 언약의 식탁 - * 말씀: 출애굽기 24장 11절 출애굽기 24장은 시내산 언약의 절정이다. 하나님은 말씀

ree610 2026. 3. 13. 07:31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 언약의 식탁 -
* 말씀: 출애굽기 24장 11절

출애굽기 24장은 시내산 언약의 절정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백성은 순종을 서약하며, 언약의 피가 뿌려진다. 그런데 그 장엄한 장면의 끝에서 뜻밖의 문장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섰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자리에서 먹고 마셨다는 것은 더 놀랍다. 본문은 언약의 결론이 단지 명령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1)

1. 살려 두셨다

"하나님이…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라는 말씀은 단순한 안전의 보고가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출 33:20)고 선언하셨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 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다. 이것은 그들이 무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기 통제였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기적이요 은혜이다.
신앙의 출발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갔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다"는 경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허락된 접근이다. 신앙은 당연함이 아니라 경탄에서 다시 시작된다.

2. 하나님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히브리어 동사 ‘보다’(chazah)는 깊은 묵시적 응시, 존재 전체로 포착하는 봄을 가리킨다. 이사야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할 때 쓰인 동사다. 그러므로 여기서 '봄'은 계시의 허용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이셨기에 인간이 본 것이다. 지식의 승리가 아니라 경이의 고백이다. 설명보다 먼저 경배가 있고, 이해보다 먼저 놀라움이 있다. 신앙은 하나님을 다 아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는 데 있다.

3. 함께 먹고 마셨다

"먹고 마셨더라." 오늘 말씀의 절정이다. 고대 세계에서 함께 먹는 일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관계의 확인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언약의 식사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가 파괴와 공포로 끝나지 않고, 친교와 평화로 나아갔다는 뜻이다. 언약은 조문이 아니라 관계이다. 그 관계는 먹고 마시는 식탁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에서 ‘언약의 피’를 말씀하셨다. 시내산에서 피가 뿌려진 뒤 식탁이 열렸다면, 십자가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새 언약의 식탁이 열렸다.
출애굽기 24장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된다. 구약의 식탁이 예표라면, 성찬의 식탁은 그 성취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출애굽기 24장 11절은 신앙의 목적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죄인을 살려 두실 뿐 아니라, 마침내 당신의 식탁의 벗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 살려진 존재로 서고, 그분이 차리신 식탁에 앉는 데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상을 베푸신다. 시내산의 식탁은 마침내 예수님의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기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식탁에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로, 낯선 자가 아니라 벗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다.

** 기도문

언약의 하나님,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살리시고 주님의 식탁으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피로 열어주신 새 언약의 은혜 안에 살게 하소서.

우리의 예배가 주님과의 참된 친교가 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