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은 곳에서 피어올린 가장 따뜻한 성소
- 백승종 박사 (역사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고교 무렵 어머니를 여읜 청년에게 남겨진 것은 서늘한 결핍의 공기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린 상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세상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사제가 되겠다는 고결한 불꽃이었다. 임실 오수의 흙내음을 맡으며 자란 그는 성인의 본명을 가슴에 품고 신의 길을 걷기로 맹세했다. 이마를 적신 세례수가 심장으로 흘러 들어갈 때, 그의 운명은 이미 낮은 곳을 향해 정해져 있었다. 가족도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지팡이가 되어준 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과 자신의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렇게 청년의 꿈은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소명의 길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축복받지 못한 고독한 가시밭길이었다. "사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라는 형수의 차가운 만류는 청년의 가슴에 못처럼 깊이 박혔다.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은 꿈을 향한 열망을 꺾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진심을 시험하는 벼림질이 되었다. 그는 화려한 수식이나 변명 대신 묵묵히 짐을 싸서 세상의 낮은 구석으로 자신을 유폐했다. 집안의 눈초리를 피해 찾아든 곳은 신학교의 성스러운 교실이 아닌 악취 나는 돼지 농장이었다. 진정한 부르심은 타인의 박수 소리가 아니라 침묵의 심연에서 비로소 들려오는 법임을 그는 알았다.
2만 평의 광활한 대지와 250마리의 돼지는 청년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살아있는 성소와 같았다. 새벽 5시의 정적을 깨우며 오물을 치우는 고된 노동은 그 자체로 간절하고 투박한 기도문이 되었다. 메탄가스의 고약한 냄새와 사나운 짐승들의 몸짓 속에서 그는 땀 흘리는 삶의 숭고함을 배웠다. 허리를 펼 틈 없는 육체적 고통은 오히려 그의 영혼을 단단하게 빚어내는 소중한 연단의 시간이었다. 스스로 번 돈으로 학비를 마련하며 닦은 자립의 길은 그가 짊어질 십자가를 향한 예비 연습이었다. 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흘린 땀방울은 훗날 그가 보듬을 소외된 이들의 눈물과 미리 맞닿아 있었다.
재수 비용을 벌기 위해 상경한 청년이 마주한 곳은 남한산성 아래 낡은 목욕탕의 지하 보일러실이었다. 때밀이라도 하겠다는 간절함조차 거절당한 뒤, 그는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무명 화부의 길을 택했다.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계산대 뒷방은 그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도방이었다. 매일 새벽 여탕과 남탕의 차가운 물을 데우기 위해 그는 자신의 청춘을 아궁이 속 불길로 던졌다. 지하실의 매연은 그에게 세상의 슬픔을 대신 태우는 사제의 검은 수단처럼 거룩하게 다가왔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불을 지피는 노동은 타인의 차가운 삶을 데워야 할 사제의 본질을 깨닫게 했다.
1988년의 혹독한 겨울바람은 지하실의 온기마저 삼킬 듯이 뼈저리게 청년의 살을 파고들었다. 산더미 같은 폐목재를 자르고 나르던 중, 녹슨 대못은 낡은 운동화를 뚫고 그의 발을 깊게 찔렀다. 의료보험도 없던 가난한 시절, 핏물 섞인 소독약과 간절한 기도는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약이었다. 통증으로 잠 못 이루는 밤마다 그는 십자성호를 그으며 신이 부여한 고난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다. 발바닥에 새겨진 그 깊은 흉터는 지울 수 없는 소명의 인장이 되어 그의 걸음마다 함께 새겨졌다. 고통 속에서 홀로 읊조린 신음은 가장 낮은 이들이 신에게 올리는 가장 정직한 찬미가로 변모했다.
주일 미사 시간에 쏟아지는 잠은 게으름의 소산이 아니라 신이 허락한 자비로운 안식의 선물이었다. 한 주간의 노동으로 지친 육신이 성당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일 때, 그의 영혼은 비로소 평화로웠다. 땀과 재로 얼룩진 투박한 옷차림은 그 어떤 화려한 사제복보다 정결한 신앙의 증거로 빛났다. 아궁이 재 속에서 골라낸 못을 고물상에 팔아 맛본 제육볶음은 그에게 성찬과도 같은 위로를 건넸다. 고난을 원망하기보다 매 순간의 작은 은총을 찾아내는 긍정의 힘이 그의 고단한 삶을 지탱했다. 비좁은 계산대 뒷방에서 매일 적어 내려간 일기는 소망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희망의 기록이었다.
최종수 신부의 삶은 가장 낮은 지하실에서 가장 높은 하늘을 향해 걸어온 경이로운 서사시와 같다. 그는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라 뜨거운 아궁이 앞의 불길 속에서 신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폐목재를 태워 물을 데우던 화부의 정성은 이제 소외된 이웃의 가슴을 따스하게 덥히는 사랑이 되었다. 청춘을 송두리째 바친 인내와 헌신의 시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성찰을 안겨준다. 진실한 삶이란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익어가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였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 소명의 빛에 닿은 그의 발자취는 이 시대가 잃어버린 성스러운 지표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