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참 행복하구나 >
최근 성경 번역의 흐름을 지켜보다가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예전에는 그저 '복 있다'라고 옮기던 아슈레이(אַשְׁרֵי)나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 같은 단어들을, 요즘은 '행복하다'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꽤 많아졌더라고요. 거룩해야 할 성경에 '행복'이라니, 어딘지 너무 가벼워진 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이 품고 있는 진짜 속사정을 한번 살펴 보기로 했습니다.
* 무릎 꿇는 은혜와 터져 나오는 감탄
성경에서 복을 지칭하는 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먼저 바루크(בָּרוּךְ)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부어주는 은혜이자,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경외의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장면이 그 전형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수직의 은혜, 그것이 바루크(בָּרוּךְ)입니다.
반면, 시편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아슈레이(אַשְׁרֵי)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가집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 이 선언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는가를 바라보며 터뜨리는 탄성입니다.
아슈레이(אַשְׁרֵי)는 문법적으로 보면 "아, 이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외치는 강렬한 감탄사에 가깝습니다. 누군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지혜자가 그 아름다운 삶의 궤적에 감동해 자기도 모르게 터뜨리는 찬사인 셈이죠. 이 단어의 뿌리에는 '곧게 나아가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행복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요행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발을 딛고 똑바로 전진하는 자를 향해 터져 나오는 경이로운 선언입니다.
* 의무를 넘어선 진짜 즐거움, 하페츠
그렇다면 지혜자가 그토록 감탄하며 바라본 '똑바로 걷는 길'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는 그것이 바로 토라(תּוֹרָה),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삶이라고 단언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하페츠(חָפֵץ)입니다.
하페츠(חָפֵץ)라는 말에는 단순히 '좋아한다'는 뜻 이상의 뜨거운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어떤 대상을 향해 마음이 완전히 쏠리고, 그것을 즐기고 싶어 하는 강렬한 의지적 기쁨을 뜻하거든요. 마치 갈증 난 사람이 물을 찾듯,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그 대상 자체에서 최고의 가치와 즐거움을 발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편 112편은 이 두 단어를 한 호흡에 묶어놓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 아슈레이(אַשְׁרֵי)와 하페츠(חָפֵץ)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입니다. 보통 법이나 계명이라고 하면 딱딱한 의무나 지켜야 할 숙제처럼 여기기 쉽지만, 하페츠(חָפֵץ)는 그 길 자체가 너무 좋아서 가슴이 뛰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억지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 매료되어 걷는 것, 그것이 아슈레이(אַשְׁרֵי)라는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 신들의 전유물을 가로채다
이 역동적인 행복론은 헬라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로 이어집니다. 본래 이 단어는 고통과 필멸의 한계를 벗어난 신들의 지복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번역자들은 이 단어를 가져와 철저히 뒤집어버립니다. 신들의 전유물이었던 이 단어를, 말씀을 즐거워하며 걷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가난한 자들의 손에 쥐여준 것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 산상수훈의 첫 선언은 그 역전의 절정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풍성한 의미들은 후대의 번역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희미해졌습니다.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 성경을 옮기며 아슈레이(אַשְׁרֵי)와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에 공히 사용한 beatus는 본래 능동적이고 충만한 행복 상태를 가리키는 강한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수 세기에 걸친 해석의 흐름 속에서, 독자들이 이 행복을 점차 인간의 능동적 응답보다는 신의 일방적 수여로만 받아들이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번역어 자체의 한계라기보다, 그것을 읽어온 신학적 전통의 문제라 할 수 있죠. 그럼에도 원어가 품은 그 서슬 퍼런 생동감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즐거워하며, 어디로 걷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 결국 다시 마주하는 본문의 기쁨
행복의 근원을 추적하는 이 지적인 모험의 끝에서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행복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말씀을 즐거워하며 걷는 그 걸음걸음 속에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하페츠(חָפֵץ)의 마음으로 토라(תּוֹרָה)를 묵상하는 일은 고단한 공부가 아니라, 가장 신비로운 보물 지도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았습니다.
이론적인 분석을 넘어, 실제로 그 말씀 한 절 한 절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속에 담긴 신비와 마주하는 순간, 거기서 이미 진짜 행복이 시작됩니다. 말씀과 함께하며, 말씀을 준비하는 그 시간 속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결국 진짜 행복은, 그분의 말씀을 펴서 읽고 그 즐거움에 젖어드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요.
- 김한원 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