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는 원로가 아니라 제도다]
그간 수많은 교회에서 원로목사와 새 담임목사 사이의 갈등 이야기를 들어왔다. 때론 세상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의 과격한 갈등 속에 법정 다툼까지 갈 정도로 적나라하다. 생각해 보면 갈등이 없는 교회가 오히려 소수에 불과할 정도다.
원로목사가 있는 교회는 청빙을 받는 쪽에서도 불안해하기 일쑤다. 한쪽의 말이긴 하지만, 뼈 있는 농담도 있다. 원로목사의 치매나 뇌출혈 소식이 담임목사에게는 “은혜요 복음”이라는 말이다. 또 어떤 이는, 원로목사가 후임 목사나 시무 장로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없으려면 후임 목사는 원로목사가 돌아가실 때까지 영원한 부목사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로목사를 끝까지 잘 모신 후임목사의 영웅담도 회자된다. 그만큼 이 제도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깊고 오래되었다.
현재 한국 주요 교단에서 원로목사 제도란, 담임목사가 은퇴한 이후에도 교회와의 제도적·명예적·상징적 연결을 유지하며 예우받는 독특한 은퇴 제도다. 일반적으로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은퇴를 청원하거나 교회의 추대를 받을 경우, 노회(또는 감독회)의 승인을 통해 성립된다. 이는 단순한 은퇴와 달리, 교회 내에서 존경과 권위를 상징하는 지위를 부여받는 방식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원로목사 제도는 협력보다는 대립을 낳기 쉬운 구조를 전제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담임목사가 소신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물론 훌륭한 원로목사도 있고, 무책임한 후임 목사도 있다. 그러나 이 갈등을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도를 고치지 않는 한 악한 지도자의 횡포를 구조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서구 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다. 원로목사 제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구 교회에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역하던 교회의 현재 목회를 방해할 수 있는 영향력은, 교회법과 강력한 윤리적 관행을 통해 상당 부분 제한된다. 은퇴는 명예를 의미하지만, 권한의 지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 교회에서 원로목사 제도가 처음부터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이 제도는 근대 한국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일종의 보호장치였다. 교회를 개척하고 수십 년을 헌신했지만 교단 차원의 연금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 은퇴한 담임목사의 노후를 교회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선의가 담겨 있었다. 여기에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이 더해졌다. 연장자는 존경의 대상이며, 연륜은 곧 권위로 여겨지는 문화 속에서 오랜 기간 헌신한 목회자를 ‘영적 어른’으로 대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이 제도가 순수한 명예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서적 결속이 강하고, 원로목사를 영적 아버지로 모시며 가족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 교회에서, 사례까지 지급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되는 순간 은퇴는 더 이상 권한의 종료가 아니라 권한 형태의 전환으로 작동한다. 물론 이 제도에는 의도된 장점도 있다. 카리스마적 리더십 아래 성장한 교회에서 급격한 리더십 전환으로 인한 혼란을 완화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이전 담임목사에게 의존하던 교인들의 심리적 불안을 완충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원로목사 제도는 구조적으로 권한은 하나인데 권위는 둘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교회가 부여한 공식적 권한과 책임은 담임목사에게 있지만, 교회를 실제로 움직이는 또 하나의 권위가 상징을 넘어 실질적인 영향력으로 남게 된다. 이 제도는 갈등을 관리하는 장치라기보다, 갈등을 서서히 축적하는 구조에 가깝다.
이중 권력 구조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흔히 후임 목회자의 리더십 부족이나 원로목사의 인격적 개입 문제로 설명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개인의 성향을 넘어 구조가 작동한다. 원로목사의 영향력이 강한 교회에서는 당회나 제직회, 공동의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원로목사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해석해야 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이는 제도를 유지하는 한, 도저히 빠져나오기 어려운 일종의 개미지옥과 같다. 늘상 다수가 넘어져 사고가 나는 빙판길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것보다, 빙판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다. 공식적 권위와 비공식적 권위의 충돌은 개인이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다.
특히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교인들의 성숙한 참여와 책임 있는 판단이 요구되는 오늘날, 원로목사 제도는 현재의 리더십을 약화시키고 교인들로 하여금 눈치를 보게 만드는 환경을 설계한다. 이는 개인의 신앙 성숙뿐 아니라 교회의 공동 책임을 훈련하는 데에도 오히려 역행한다.
원로목사 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오랜 세월 헌신한 선배 목회자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는 존경을 권한과 분리하자는 제안이다. 감사는 명예로 표현하되, 교회의 결정과 책임은 현직 담임목사에게 온전히 맡기자는 주장이다. 모범적이고 훌륭한 원로목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제도는 선한 사람만을 전제로 설계될 수 없다. 선한 원로가 있더라도, 권한은 하나인데 권위가 둘로 나뉘는 구조는 언제든 갈등을 낳을 수 있다. 원로목사 제도 자체가 보이지 않는 기준점을 형성하는 순간, 교회는 혼란에 빠지기 쉽다.
원로목사에게 지급되는 사례비 역시 단순한 생활비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적 어른’에 대한 존경이 과도한 방식으로 제도화되기도 한다. 원래는 예우였으나, 대형교회의 경우 사실상 고정 급여 수준으로 보이는 사례도 적지 않다. 담임목사 사례비의 일정 비율(예를 들어 70%)을 지급하거나, 교회 제공 차량과 운전기사, 비서 인건비까지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교회는 재정이 어려워도 이 비용만큼은 성역처럼 유지되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후임 목사로 선출하기도 한다. 은퇴한 담임목사에게 필요한 것은 노후를 책임지는 제도이지, 또 하나의 정치적 장치가 아니다. 명예직이라면서 이런 혜택이 지속되는 순간, 원로목사는 ‘권한 없는 현역’으로 인식되기 쉽다.
미국 교회가 모두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교단이 원로직을 제도화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국 PCUSA에서는 은퇴한 담임목사는 자신이 사역하던 도시에 살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자신이 사역하던 교회의 교인과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거리 밖에 살라는 것이다. 후임목사가 초청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불문율이다. 은퇴한 목사가 후임 목사의 사역에 개입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은퇴 목사에 대한 존경은 표현할 수 있지만, 존경을 제도화하는 순간 권위의 충돌은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목회가 직분이라면, 은퇴와 함께 그 직무는 종료되는 것이 원칙이다. 결국 원로목사 제도의 핵심 문제는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원로인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이 제도를 계속 유지하는가”이다. 은퇴한 목회자의 생계를 교단이나 교회가 책임지는 것은 정당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원로라는 직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확한 생계 지원 제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원로목사 제도는 유익보다 갈등의 가능성을 더 많이 낳는 구조가 되었다. 과거에 의미가 있었던 제도가 오늘날에도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로제도의 폐지는 전통의 부정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책임 있는 선택일 것이다. 평화!!
- 이민규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