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영성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메시아!” * 말씀: 스가랴 9장 9절 우리는 ‘빠를수록 좋고, 강할수록 안전하다’는 신화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죠.

ree610 2025. 12. 22. 08:11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메시아!”
* 말씀: 스가랴 9장 9절

우리는 지금 ‘빠를수록 좋고, 강할수록 안전하다’는 신화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아침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경주로에 내던져진다. 저녁이면 탈진한 채로 집으로 돌아온다. 사회 불안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강한 리더, 더 단호한 언어, 더 선명한 진영을 원한다. 그래서 세계는 점점 ‘말과 병거’의 방향으로 달린다. 속도는 미덕이 되고, 공격성은 결단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달릴수록 평화는 멀어진다. 이것이 오늘 정치와 경제, 사회와 종교가 서로 밀치며 만들어 내는 풍경이다. 이때 스가랴는 뜻밖의 장면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왕이 오신다. 그런데 군마가 아니라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 낯선 행렬은 세상의 모든 상식을 전복시킨다.

1. “보라”: 왕이 너에게 오신다

‘보라’는 현실을 다시 읽으라는 초대다. 그리고 예언자는 말한다.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이 왕은 멀리서 군림하는 상징이 아니라, 너에게 다가오시는 왕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멀리서 평가하지 않고, 가까이 오셔서 새 질서를 시작하신다. 신앙은 새로운 인격의 방문을 맞는 일이다. ‘크게 기뻐할지어다’, ‘즐거이 부를지어다’라는 기쁨이 먼저 선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기쁨은 왕의 도착이 열어젖히는 미래를 미리 당겨 사는 믿음에서 온다.

2. ‘새끼 나귀’의 정치신학: 폭력의 문법을 끊는 메시아

고대 세계에서 ‘말과 병거’는 전쟁과 정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오실 메시아는 ‘나귀, 곧 나귀 새끼’를 타신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 선언이다. 세상 권력은 대개 위협에서 압박으로, 압박에서 정복으로 질서를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회복을 통해 생명을 일으키고, 그 생명으로 화평을 세우신다. 그래서 나귀는 단지 온유함의 표정이 아니라, 전쟁의 오랜 메커니즘을 끊는 표지다.

오늘 우리가 더 세게 말하고, 더 빨리 몰아붙일수록 사실은 마음의 투쟁과 이웃과의 전쟁이 오히려 깊어질 때가 많다. 그때 새끼 나귀를 탄 왕은 속도를 늦추고, 관계를 살리고, 적대의 언어를 끊어 내신다. 왕의 통치는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

3. 의로움과 겸손과 화평: 메시아의 품성

스가랴는 이 왕을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겸손한 분’으로 묘사한다. 성경의 의는 깨진 관계를 바로 세우는 힘이며 억울한 자를 일으키는 정의를 뜻한다. 그런데 그 의는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여기서 ‘겸손하여’는 단지 공손한 태도를 넘어, 가난함과 억눌림, 고난의 현실을 아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왕은 상처의 언어를 아는 왕이다. 복음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왕이 오시는데, 무기가 없다. 목표는 정복이 아니라 화평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슥 9:10)

이 예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더욱 선명해진다(요 12:15).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나는 이런 왕이다”라고 몸으로 말씀하신다. 군중의 ‘호산나’ 환호가 그분의 왕권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이 왕권의 본질임을 드러낸다. 세상이 승리를 위해 누군가의 패배를 요구할 때, 예수님은 자기 비움으로 우리를 살리는 승리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시 세우는 하나님의 왕좌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왕을 기다리는가?”
우리 불안을 달래 줄 강한 왕인가, 아니면 우리의 폭주를 멈추게 하고 관계를 살리는 왕인가. 어린 나귀를 탄 메시아는 우리 마음 속 군마를 길들이러 오신다. 그리고 우리를 화평의 사람으로 세우신다. 그래서 다시 노래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슥 9:9)
이번 성탄절에도 이런 기쁨이 바로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를 간구한다.

** 기도문

공의와 화평의 하나님,
우리 안에 불쑥 솟구치는 조급함과 공격성을 잠잠케 하소서.
불안할수록 강력한 통제를 원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소서.

우리의 분노를 주님의 공의에 맡깁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주님의 온유하심에 내려놓습니다.

‘누가 이기나’가 아니라 ‘누가 살아나나’를 바라보게 하소서,
곧 예수님의 평화를 목표로 삼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