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가라 세월
- 고인숙
분노하지 않기로 하자
슬퍼하지도
불쌍해하지도
그냥 마음 다독거리기로 하자
지난 봄 혹독한 가뭄 속
아등바등 자란 무를 뽑으며
난쟁이 노란 얼굴 강낭콩 북을 주며
눈물이 흐르고 만다
호밋자루 팽개치고
바삭바삭
밭둑에 간신히 피운 색색과 알록이 패랭이꽃덤불에 앉아
청태 낀 물웅덩이나 바라보다가
우중충한 하늘이나 바라보다가
그냥 세월 가라고 하자
어서어서 이 시절 떠나보내고 말자
호호백발 구부러진 세월이라도
지금보다는 나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