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벨의 사람들, 오순절의 사람들 (창 11: 1-4, 행 2: 1-8) - 정종훈 목사
성령강림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백향나무교회 교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신앙공동체인 백향나무교회 위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강과 삶의 뜨거운 열정이 가득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과 관련된 유머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주일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이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교인이 목사님께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좋았어요.” 목사님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한 건가요. 성령님께서 영감을 주신 거지요.” 그러자 교인이 손을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설교가 좋았던 것은 아니고요.” 이 유머는 ‘얄미운 교인’이라는 제목의 유머였습니다. 우리 백향나무교회 교우 여러분들 가운데는 얄미운 교인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을 기대하며 감히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창세기와 사도행전 두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바벨의 사람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오순절의 사람들입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우리가 지양해야 할 반면 거울이라 할 수 있고, 오순절의 사람들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이정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벨의 사람들과 오순절의 사람들이 각각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 특징을 살펴보면서,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한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믿음과 관련해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믿고 삽니다. 누구를 믿느냐, 무엇을 믿느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조차도 사실은 “나신교”, “나를 믿는 종교”의 신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놓고 믿기에 진짜 하나님의 자리를 스스로 없애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높은 탑을 쌓으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노아 당시 대홍수 사건으로 인류가 심판을 받았던 사실을 조상들에게 들었을 것이고, 그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죄에 대한 심판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심판 이후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고, 다시 심판의 홍수가 내리게 되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들은 높은 탑을 쌓아두면 언젠가 홍수심판이 있을 때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바벨의 사람들이 높은 탑을 쌓았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심판하시는 두려운 존재일 뿐, 인류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이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의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고, 부활하신 주님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었을 때, 철저히 실망했고, 그들 역시 죽거나 어려움을 당할지 몰라 자신들의 정체를 은폐하며 숨으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죽은 줄로 알았던 주님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들은 새로운 힘과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주님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대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순절의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전심으로 기도하다가 성령의 역사를 충만하게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들의 존재를 전적으로 새롭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바벨의 사람들도 있고, 오순절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고 삽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살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술수를 믿고, 자신의 계획과 처방을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자신의 무력함을 먼저 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압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변 환경을 보기보다는 환경 자체를 바꾸시는 능력의 주님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삽니다.
어느 교인이 믿음을 주제로 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을 들어 바다로 옮기려고 한다고 해도 옮겨질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과 “베드로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바다를 걸을 수 있었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의 믿음을 즉시 확인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강가로 가서 발을 들어 과감하게 강물로 뛰어들었는데, 강물 위를 걷기는커녕 깊은 강물에 빠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습니다. 화가 난 그는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저는 믿음을 가지고 물에 들어갔는데, 왜 물에 빠진 것입니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셨지만, 교우님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강물에 들어가셨습니까?”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랐고, 오순절의 사람들은 주님 예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바벨의 사람들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순절의 사람들로 살고 있습니까? 바벨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오순절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둘째는, 이름과 관련해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름은 존재 자체를 의미하고, 인생 전체를 암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름 안에 인생 전체가 담겨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라는 이름은 흙을 의미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흙으로 만들어졌고,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물을 의미합니다. 죄지은 인간은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이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처럼 귀중한 존재로서 파트너가 되어 그분과 관계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세 가지 이름의 의미만 제대로 깨달아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존재이고, 우리는 노아로서 죄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관계할 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모든 인간의 삶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대에 길이 남기고자 탑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행위의 목적을 자신들의 이름에 두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둔 것입니다. 탑을 쌓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낸 결과, 자기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 역시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을 삶의 이유이자, 삶의 목적으로 삼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죄입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묻지 않았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오순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만나면서 그의 존재 의미가 달라졌던 사람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지만, 존재의 변화를 드러내고자 주님께서 이름을 베드로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크게 공헌했던 바울 역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존재가 완전히 달라졌던 사람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 사울은 기독교인들에게 공포의 이름이었지만, 개명한 이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모든 사람에게 감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순절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삶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이셨고, 창조주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에도 바벨의 사람들이 있고, 오순절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삽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은 더 이상 안중에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들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이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처신하고 행동합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음력으로 4월 초파일이 생신이십니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 바로 그날입니다. 어느 여승이 이 사실을 알고 집에 찾아와 절에 이름을 두어야 잘살 수 있다며 할머니를 설득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절과 인연을 맺고 사셨습니다. 심지어 그 여승을 어머니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심한 병을 앓으셨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셨지만 잘 낫지를 않으셨습니다. 병원 치료를 위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두루 방문하셨고, 유명한 한의사를 찾아다니셨고, 절에서는 불공을 드리셨습니다. 심지어 무당을 불러 굿도 하셨지만, 병의 차도는 없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믿으면 병에서 나을 수 있다는 전도를 받고, 지푸라기를 집는 심정으로 교회를 나가셨는데, 그 후 병에서 말끔히 나으셨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당신의 고향마을에 단 한 사람도 기독교인이 없던 시절에 교회를 나가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은 후 신학교 진학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성함을 구름 운(구름)자 소리 성(聲)자 구름 위의 소리 “운성”에서 은혜 은(恩)자 소리 성(聲)자 은혜의 소리 “은성”으로 바꾸셨고, 평생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으로 사역하시다가 은퇴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 이름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하시는 그러한 이름이 되었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벨의 사람들처럼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이름과 존재 자체라도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야웨만이 우리 삶의 출발이 되어야 하고,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 삶의 역동적인 에너지로 작동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성을 쌓는 것과 관련해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입니다. 성을 쌓는 것은 성의 안과 밖을 완벽하게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벽은 성안의 사람들을 동지적인 관계로 만들지만, 성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관계를 만드는 법입니다. 독일어로 시민이라는 말은 Bürger인데, 성안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들은 게르만 민족 출신의 자기 시민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보았지만, 게르만 민족 밖의 사람들, 특히 게르만 민족의 자존심과 부를 위협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동물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고, 국경을 접한 폴란드 국가에 대해서는 위대한 게르만 민족을 위해서 삶의 환경을 제공하는 2등 국가가 되어야 한다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성을 쌓고 성 밖으로 흩어지는 것을 거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직접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 인정하기로 했고, 자기들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성 밖으로 밀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며 모든 인간을 축복하셨는데, 그들은 세상으로 흩어져 다양한 삶을 누리며 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바벨의 사람들이 서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혼란하게 하셨는데, 이는 저주가 아니라 원래의 축복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삶의 다양성, 문화의 다양성, 민족의 다양성 등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다양성은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통해 풍요로움을 누릴 기회라서 사실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바벨의 사람들은 성을 쌓고, 성안에서 자기들만의 축제를 즐기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성 밖의 사람들은 무시하고, 억압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의 사람들은 모든 벽을 허물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어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모든 언어를 폐기 처분하고, 새로운 세계 공용어를 만들어서 의사소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각 민족의 출신을 부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들 각자의 언어 그대로 의사를 소통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으로서 갈릴리말로 복음의 이야기를 전했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와 삶의 흔적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복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벽을 허뭅니다. 남성과 여성의 벽을 허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벽을 허뭅니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벽을 허뭅니다. 민족과 민족의 벽, 언어와 언어의 벽, 문화와 문화의 벽, 심지어 종교와 종교의 벽마저 허뭅니다. 이처럼 오순절의 사람들은 언어와 민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다양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모두의 축제를 함께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때로는 바벨의 사람들처럼 살고, 때로는 오순절의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서로를 자꾸 분리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너는 나와 다르니까 안 된다”라고 하고, “너는 나와 다르니까 틀렸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와 같은 출신의 사람은 친구이지만, 다른 출신의 사람은 당장 적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사람들은 이미 분리해 놓은 담마저 부수어 버립니다. 그들은 “네가 나와 다른 것은 나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고질적인 병 가운데 하나가 연고주의입니다. 우리는 혈연, 지연, 학연에 익숙해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개신교인들의 경우 종교연까지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 연고주의를 깨지 못하는 한 우리는 바벨의 사람들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경멸하고, 제3세계에서 시집온 다문화 여성들을 무시하고, 탈북민들을 우습게 보고, 난민신청자들을 배격하고, 이러는 것은 끼리끼리를 중시하는 바벨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령만이 끼리끼리의 연고주의를 깰 수 있고, 성령만이 우리를 오순절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웃들이, 출신과 배경이 다른 교우들이 풍성한 축제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삶의 방향과 관련해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입니다. 삶의 방향에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방향이 있고,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방향은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방향이고,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방향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방향입니다.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방향은 자기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방향이고,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방향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섬기는 방향입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탑을 쌓으며 아래로부터 위를 향했던 사람들입니다. 탑이라는 것은 높은 기술과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건축물입니다. 역사를 보면, 사회적인 약자들이 탑을 쌓는데 동원되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를 위해서 지은 스핑크스나 피라미드는 수많은 노예의 죽음 위에서만 가능했습니다. 바벨의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존재란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든 말든, 그들이 죽든 말든, 곤경에 처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마음대로 살려는 자신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착각했습니다. 이처럼 바벨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도, 다른 사람들도, 양심도 외면하고, 오직 인간의 오만과 악한 본능을 따라서 위에 있는 높은 탑을 향했던 사람들입니다.
오순절의 사람들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계시에 삶 전체를 맡겼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방향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를 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은 위에서 아래로 낮아진 하나님의 첫 출발이었습니다. 피조물 인간과는 질적 차원이 다른 창조주의 존엄을 아래에 있는 인간에게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세상의 밑바닥 자리까지 찾아오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범죄한 카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저 높은 하늘에 머물러서 세상을 심판하려 하시기보다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낮은 세상에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께서는 소외된 자들, 죄인들, 병자들, 정말 별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오순절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영, 성령의 내려오심을 통해서 위로 향하던 오만한 삶의 방향을 아래로 겸손하게 바꾸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바벨의 사람들이 와글와글합니다. 그들에게는 생존경쟁이 삶의 덕목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 증오와 미움을 삶의 방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거나 도구화해도 괜찮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자기가 부자로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면,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길이라면, 어떤 불법도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처음에는 바벨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우편에 올라가고, 누가 예수님의 좌편에 올라갈 것인가가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아들들의 자리를 청탁할 때 하나같이 분노했다. 그들은 높은 윗자리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보혜사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그들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만 보였고, 주님이 사랑하신 별 볼 일 없는 지극히 작은 자들만 보였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주님이 전부가 되었고, 지극히 작은 별 볼 일 없는 자들을 우선적인 관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심지어 순교자로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바벨은 하나님을 배제하는 인간의 부끄러운 자리입니다. 오순절은 인간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입니다. 바벨은 하나님을 외면하다 스스로 파멸에 빠진 저주스러운 자리입니다. 오순절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의 인간을 만들어 주신 축복된 자리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분열된 인간을 찾아오셔서 하나가 되도록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자기 언어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인간들을 바꾸어서 상호 소통하도록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저 낮은 곳까지 내려가도록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꿈을 주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사랑하는 백향나무교회 교우 여러분, 믿음은 자신의 욕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도 타인도 모두를 해치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 모두를 구원의 자리, 행복의 자리로 이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다양한 인류를 적대적인 관계로 분열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적대적인 인류조차 하나의 가족으로 모은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욕망에 빠진 사람들을 징계하시지만, 낮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적과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성령의 도우심과 충만함을 간절히 사모하며,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백향나무교회 교우 여러분 모두가 바벨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오순절의 자리로 나아가 오순절의 사람들로 살아가시기를 성령을 보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성령을 소망하게 하시고, 성령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어려운 주변 환경을 보면서 절망하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지니고 담대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기보다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기들의 성을 쌓고 분열하기보다는 누구라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상호소통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신의 오만과 욕망을 따라서 위를 추구하기보다는 사랑과 평화가 절실한 세상을 직시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