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자에서 순례자로! - 은혜의 사닥다리
* 말씀: 창세기 28장 12절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최고의 도망자, 야곱을 만난다. 뒤에는 형의 분노가 있고, 앞에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있다. 발걸음은 무겁고 마음은 쫓긴다. 그는 형을 피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피한다. 죄책감은 가장 끈질긴 추격자다. 거짓과 탐욕이 남긴 그림자가 그의 등을 떠밀고 있다. 야곱의 삶은 어느새 광야가 되고, 잠자리는 돌베개가 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밤을 부끄러움으로 봉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도망자의 밤에 찾아오신다. 은혜는 우리가 멀쩡할 때만 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무너진 자리에서 먼저 도착한다. 도망자의 길 한복판에,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놓으신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2)
1. 도망자의 밤, 멈춰 세우는 은혜
도망자의 심리는 늘 쫓긴다. 숨을 곳은 있어도 쉴 곳은 없다. 도망은 속도를 내지만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야곱은 결국 멈춘다. 하지만 멈춤은 실패가 아니다. 하나님이 붙드시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사닥다리가 보인다. 이것은 야곱이 쌓아 올린 탑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내려오신 표지다. 하나님은 야곱을 추궁하기 전에 먼저 붙드신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죄인도 버리지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의 기초다. "네가 여기까지 왔구나"가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왔다"가 은혜의 첫 문장이다.
2. 하늘에서 땅으로, 먼저 내려온 사닥다리
꿈 속의 사닥다리는 땅에 '세워진' 길이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길이다. 도망자는 하늘을 향해 오를 힘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길을 내리신다. 이것이 은혜의 방향이다. 우리가 올라가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려와서 만나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내린다. 먼저 ‘올라간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야곱 곁에 있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야곱보다 먼저 그 자리에 계셨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역사하신다. 도망자의 밤에도, 하늘은 닫히지 않는다. 돌베개는 차갑다. 하지만 그 차가운 현실로 내려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은혜는 높은 자리에서 손 흔들지 않는다. 은혜는 바닥으로 내려와 우리 옆 돌바닥에 함께 앉는다.
3. 유랑이 순례로 바뀌는 곳, 벧엘
야곱은 깨어나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창 28:16) 야곱에게 필요했던 것은 갈 길을 보여주는 지도가 아니라 임재였다. 길을 '아는 것'보다, 누가 '함께 하는지'가 먼저였다. 그래서 스쳐 지나가는 우연의 공간이 필연적인 장소로 바뀐다. 광야가 성소가 된다. ‘루스’가 ‘벧엘’(하나님의 집)이 된다. '하나님의 집'은 건물이 아니라 임재의 사건이다. 야곱의 신분도 바뀐다(창 28:19). 비겁한 도망자가 거룩한 나그네가 된다. 죄가 사라져서가 아니다. 약속이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창 28:15)는 이 약속이 야곱의 도망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이 사닥다리는 결국 그리스도께 닿는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 사이의 ‘참된 길과 진리’(요 14:6: The Way & The Truth)이시다. 우리가 하늘로 오를 수 없기에, 하늘에 계신 분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십자가는 그 사닥다리가 가장 깊이 박힌 자리다. 사닥다리의 맨 아래 끝이 십자가라면, 그 위쪽 끝은 부활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도망자의 밤은 마지막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숨은 자리, 그 어두운 광야, 그 차가운 돌베개 곁에 이미 은혜의 사닥다리가 내려와 있다. 오늘 할 일은 거창하지 않다. 도망을 잠시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도망자의 우리 모습을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주님, 여기에도 계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조용히 대답하신다. "내가 여기 이미 너와 함께 있다."
우리가 대답한다. “이제는 도망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순례자로 살겠습니다.”
** 기도문
벧엘의 하나님,
우리는 돌베개 같은 현실 앞에서 자주 두려움으로 도망쳤습니다.
하늘의 사닥다리를 내리셔서 우리를 멈춰 세우시는 은혜를 감사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광야 같은 자리를 ‘하나님의 집’(벧엘)으로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의 유랑을 멈추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이제 도망자가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순례자로 살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