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겠나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 말씀: 창세기 24장 58절
부르심은 대개 거창한 음성으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가장 평범한 질문 속에 숨어 다가온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창 24:58)라는 질문은 단지 결혼 절차의 확인이 아니다. 그것은 한 젊은 여인의 미래, 한 가정의 계보, 더 멀리는 하나님의 언약 역사까지도 이어지는 갈림길의 질문이다. 그리고 리브가는 단 한마디로 자기 인생의 방향을 정한다: “가겠나이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 24:58)
1. 질문이 먼저 온다
창세기 24장은 길고 반복이 많지만, 핵심은 놀랄만큼 짧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도 복잡한 논증이 아니라 “예와 아니오”로 갈린다. 리브가의 가족은 열흘만 더 머물자고 말한다(창 24:55). 지체는 꼭 악이 아니다. 사랑의 언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체는 종종 두려움이 고운 옷으로 차려입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조금만 더’라고 말할 때,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준비가 아니라 회피일 때가 있다. 부르심 앞에서 가장 영리한 핑계는 늘 ‘내일’이다. 리브가의 “가겠나이다”는 그 ‘내일의 핑계’를 끊는 칼날 같은 대답이다.
2. 믿음은 정보보다 ‘관계’에서 시작된다
리브가가 알고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그가 아는 것은 종의 말과 선물과 징표, 그리고 가족의 반응 정도다. 그는 남편이 될 이삭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낯선 땅에서 겪게 될 외로움과 불확실성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가겠다’고 말한다. 여인의 용기이다. 믿음의 본질이 여기서 드러난다. 믿음은 충분한 정보가 모여 생기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신 길을 신뢰하며 내디디는 걸음이다.
이 응답은 ‘내가 가겠다’는 인격적 결단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격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 인격이 ‘예’라고 답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그 사람의 생애 속에서 역사로 변한다.
3. 떠남에는 아픔과 성숙이 동행한다
떠남은 아름답지만 아프다. ‘가겠다’는 말 한마디는 함께 했던 가족의 품을 떠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숙은 분리의 통증을 통과한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떠나야 할 집을 가진다. 인정 욕망, 통제 욕구, 과거의 상처, 익숙한 자기 방식이 떠나야 할 자리로 남아 있을 때가 있다. 믿음은 두려움이 사라져서 출발하는 상태가 아니다. 두려움을 안고도 방향을 붙드는 담대함이다. 그래서 리브가의 “가겠나이다”는 낭만적 용기라기보다는 현실을 품은 성숙한 담력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너는 나와 함께 가겠느냐?”
예수님의 부르심은 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그분의 초청은 익숙한 자리를 내려놓게 하며, 자아의 왕좌에서 내려오게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이고, 제자도는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는 응답이다. 은혜는 우리를 순종의 길로 옮겨 세운다.
* 마무리하며 - 김지철 목사
리브가의 “가겠나이다”는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 서는 교회의 고백을 기억나게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이고, 제자도는 “우리가 그분을 따라 가는 응답”이다. 구원은 은혜로 시작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순종의 길로 옮겨 세운다. 참된 신앙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다”에서 끝나지 않고,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로 이어진다. 이 한마디가 오늘의 삶을 움직이는 방향이 된다.
** 기도문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머뭇거리는 우리 마음을 붙드소서.
‘조금만 더’라는 말로 두려움을 숨기지 않게 하소서.
확실함을 다 갖춘 뒤에 움직이려는 우리 계산을 내려놓고,
우리 입술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행동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아멘.